◇사진설명: 북한 인민학교 2학년생들이 소년단 입단식에서 입을 모아 소년단 선서를 외워 복창하고 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기억력이 비상하다. 북한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잘 외워야 출세한다.

끝없이 외우고 또 외우는 생애는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유치원마다 설치돼 있는 연구실에 들어가 김일성 생가 모형세트를 보고 학습을 받는다. 그림만 보고도 '들메나무에 오르시어 무지개를 잡으시는 김일성 원수님...' 하며 또박또박 입을 모아 암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인민학교(초등학교)에 가면 100쪽에 가까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어린시절을 따라 배우자 이동 도록’을 암송한다. 부모들은 새벽부터 아이들을 깨워 제대로 잘 외우고 있는지 성화를 한다. 아이들 때문에 부모들의 사상성이 의심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민학교 학생들이 2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는 소년단에 들기 위해서는 이 도록과 함께 소년단원 선서, 의무, 권리, 지켜야 할 사항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야 한다.

2월 16일(김정일 생일), 4월 15일(김일성 생일), 6월 6일(소년단창립일) 세 차례에 걸쳐 입단하게 되는데 잘 외워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입단 순서가 밀리게 된다. 고등중학교에 들어가면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활동 이동도록’이라는 두배쯤 두꺼워진 도록이 또 기다리고 있다.

성년이 되어도 외우기 의무는 계속된다. '문답식 학습경연'이라는 북한식 경시대회를 통해서 암기실력은 배가된다. 북한에서는 '문답식 학습경연'이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이라고 말하고 널리 권장하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 생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학습경연대회를 열어 암기실력을 겨루게 된다. 대회마다 암기할 문헌의 종류와 수준은 약간씩 다르지만 대체로 김일성 김정일의 약력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은 김일성 김정일 '따라배우기' 도록으로 주로 경연을 벌이고, 대학을 비롯한 사회의 각 조직에서는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현재 9권까지 발행), 김정일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 등의 두껍고 여러 권으로 된 노작을 대상으로 경연을 벌인다.

이런 노작들이 미리 주어지는 기본문제라면, 다음으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져 암기실력을 테스트하는 고난도의 보충문제를 풀어야 한다. 경연대회의 참석자들은 앞에 나가서 각자 자신이 암기할 부분을 제비로 뽑는다. 어떤 대목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책 몇권 분량을 통달해서 외워내야 한다. 기본 문헌의 암기실력은 비슷하지만, 다음 단계의 보충질문은 훨씬 어렵다. 그리고 나서 노래가 출제된다. 노래의 경우는 각자가 뽑은 노래를 3절이든 4절이든 끝까지 불러야 하며 단 한 자만 틀려도 그만이다. '정일봉의 우뢰소리' '장군님의 군대가 되자' 등의 노래를 미리 20곡 이상 외워두지 않으면 낭패한다.

학습경연대회는 각 초급당 수준에서 시작되어 전국대회로까지 확장되며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릴 때는 각 시 도 대표들이 경이로운 암기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평양의 한 출판사 부문 당 대표로 전국대회에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는 김명숙(58)씨는 "일단 대표로 뽑히면 출근해서 암기만 한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우고 또 외우기를 거의 20일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막상 대회에 나가 보면 아무리 두꺼운 책도 처음에서 끝까지 한 자 안 틀리고 외우는 경이로운 사람들이 많아 입상은 쉽지 않다.

북한사회에서 당간부라면 일단 암기 실력은 인정하고 봐야 한다.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100쪽이 넘는 김일성 김정일 약력도 줄줄 외워야 한다. 입당의 필수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초급당, 시군 당을 거치는 입당 심사에서 암기실력은 곧 당성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주의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원칙'(원고지 160장 분량)은 당원이건 아니건 늙건 젊건 북한사람이면 누구나 외워야 한다. 소책자로 만들어 보급되는 이 문헌을 외지 않으면 북한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다. 매년 신년사도 남녀노소가 통째로 외워야 한다. ‘교실국가’ 북한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외워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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