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相勳
/논설위원 jhyang@chosun.com

지금부터 50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6·25전쟁의 포성이 멎었다. 이 전쟁의 진실은 1994년 러시아 정부가 6·25전쟁 관련 문서를 공개함으로써 만천하에 드러난 바 있다.

김일성은 남침을 위해 소련을 집요하게 설득하면서 중국과도 긴밀한 전쟁 협의를 계속했다. 문서에 따르면 1950년 5월 14일 중국의 모택동은 김일성이 파견한 김일과 만난다.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기습전과 지구전 모두에 대비해야 하며, 만약 지구전이 되고 최악의 경우엔 중국군을 파견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김일성은 남침을 개시했으나 전세가 역전됐고 넉 달 만에 모택동은 약속대로 수십개 사단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중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물밀듯이 넘어온 1950년10월 25일,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비극이 새롭게 시작됐다.

국군 6사단 7연대가 1950년 10월 26일 최초로 압록강에 도달했으나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우리의 통일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곧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2년여를 더 끌면서 77만명의 국군과 99만명의 국민이 사상을 당하고 온 국토가 말할 수 없게 피폐됐다. 그후 이어진 남북대결의 비극과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생활상,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북한 핵폭탄 악몽까지 이 모든 질곡이 모택동의 명령으로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은 그날 시작됐다.

그 엄청난 피를 흘리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됐다. 정전 50주년인 7월 중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 대학생으로부터 ‘존경하는 중국 정치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역시 모택동 주석과 등소평 주석”이라고 답했다.

사인(私人)이 아닌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가 중국에서 모택동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자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국립묘지에 누워 있는 국군 전사자들과 그 유가족들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를 도와 피를 흘렸던 16개 유엔국과 참전 노병들은 또 무엇이 되는가. 중국인들조차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부끄러울 뿐이다.

이것은 정전 50주년에 우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대통령으로부터 들어야 할 말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는 비록 고난에 차 있지만 이렇게 함부로 내동댕이쳐져서 아무나 밟고 지나가도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 후진타오 주석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을 옆에 둔 채 “북한의 안보 우려도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북한을 배려해야 할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 역시 북한 핵으로 가장 심각하게 안보 위협을 당하고 있는 우리가 정전 50주년에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들어야 할 소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공동 기자회견 모습을 TV로 보던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한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는 왜 갑자기 이렇게 작게 느껴지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털어놓은 사람도 보았다.

지난 50년간 갖은 질곡을 거치면서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중국을 앞섰다고 자부했던 우리가 너무나 빨리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이들 모두에게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도 성장일로로 단독질주, 이제는 중동의 유전개발전에도 명함을 내미는 나라가 됐다. 동남아시아 전역과 말래카해협, 남중국해, 동중국해 등 아시아 해상 전략지역 모두가 중국의 패권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무력감에다 당당하고 노련한 중국의 리더십과 가볍고 불안한 한국의 리더십이 대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TV 채널을 돌려버렸다고 한다. 이들이 며칠 뒤 신문에서 본 것은 “지금은 나와 언론사 간 게임 중”이라는 노 대통령의 귀국 기내 회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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