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

9·11 테러는 미국의 안보축을 서쪽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공산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냉전의 틀에서 유럽을 중시했던 것과는 달리, ‘테러 대 반테러’라는 새로운 이정표에서는 아시아·오세아니아·중동 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지난 2년 동안 대테러의 깃발 아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호주는 새로운 전략기지이자, 혈맹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우선 요즘 일본의 외교 안보정책에는 거침이 없다. 일본 정치권은 1977년 이후 26년 동안 숙원과제였던 유사법제를 눈치보지 않고 통과시켰다. 또한 100여 명의 의원들이 전수방위 원칙을 포기하고 선제 공격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재해석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넣고 있다.

북핵 위기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일 정권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초강경 발언도 공공연하게 도쿄 정가에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자신감은 일본의 군사 보유와 국제 사회 참여에 대한 미국의 암묵적 지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의 팽창 저지와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해 일본의 군대 보유 및 무력 사용을 극도로 제한해 왔다.

9·11 테러와 북한 핵 위기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미국은 일본의 자주 방위와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한 참여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일본은 북한 핵, 노동,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같은 위기 상황이 올 때마다 신방위대강, 미·일 신가이드라인, 주변 사태법 등을 통과시켰다.

나아가 대 테러전의 강력한 미·일 공조를 기반으로 경쟁자인 독일을 따돌리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는 것도 꿈꾸고 있다.

대 테러의 관점에서 일본은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동북아의 마지노선이자, 오키나와에서 대만,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안보벨트의 핵심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핵 문제에 있어서도 해상봉쇄와 경제 제재를 통해 북한에 실질적인 압박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유일한 국가다.

공교롭게도 9·11 테러가 일어났던 당일,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참상을 목도한 하워드 총리는 미국의 대 테러전을 시종일관 지지해왔다. 1년 뒤 미 의회에서 그는 ‘만약 미국이 공격을 받는다면, 호주는 그곳에서 지체 없이 미국을 도울 것’이라고 연설해 상·하원 의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호주는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주요 훈련장이자 은신처가 되고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견제할 수 있는 거점이다. 북한 문제에 있어서도 헤로인을 실은 북한 화물선 봉수호를 호주 군경이 적발, 북한의 마약 수출과 위조지폐 유통을 새로운 국제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향후 미군의 해외 재배치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 미군 5000여명을 호주에 배치할 경우 호주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기지로 부상할 것이다.

이처럼 9·11 테러와 북핵 위기를 계기로 아시아 안보에서 한·미·일 공조보다는 미·일·호주 공조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긴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채 북핵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자국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주변국들의 두 얼굴을 계속 경험하게 될 것이다. 위기를 더 큰 기회와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는 영민한 한국 외교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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