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基
부국장대우 국제부장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일본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머지 않아 중국과 러시아도 방문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 중에 취임 첫해에 주변 4강국들을 다 돈 전례가 없는데, 대단한 의욕이다. 우리가 살길은 경제와 외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외교 중시는 좋은 일이다.

문제는 어떤 목표와 메시지를 갖고 4강 지도자들을 만나느냐는 것이다. 한국 외교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기 위한 ‘통일 외교’이며, 그 이전까지의 요체는 ‘분단 관리 외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밖으로 정상외교에 나서기에 앞서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자세를 정립하고 목표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통일을 어떻게 추구할 것이며, 그러기까지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고, 발등에 떨어진 불인 북한 핵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문제들에 상당한 복안(腹案)을 갖지 않고서는 외국 지도자를 만나봐야 할 이야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관해 대통령은 외국 지도자들과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먼저 국민들에게 생각을 밝히고 이해와 합의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노 대통령은 지금껏 그런 과정을 거의 밟지 않았다. 그는 일본 국민들과의 대화에서 “평화를 확고히 하고 번영을 이뤄나가면 통일은 천천히 돼도 좋다”고 말했다. 전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북한과의 평화 공존을 강조하면서 “통일은 20∼30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우선 평화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결국 통일을 지연시키고 분단상태를 고착시킨다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평화’란 말은 17차례나 반복했지만 ‘통일’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과의 평화 공존은 결국 김정일(金正日) 체제의 존속을 조장하며 그와의 협력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민족 전체 구성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북녘 주민들의 기아와 질곡의 장기화와, 남북 이산가족들 및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의 장기화를 뜻한다.

지금 국제사회 최대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김정일 무법(無法) 정권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 국가가 남의 나라 위조지폐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마약을 밀매하고, 남의 나라 선량한 시민들을 납치해서 죽이거나 아니면 자기네 공작원 양성에 쓰니까, 국제사회가 북한을 ‘범법자 국가(outlaw state)’니 ‘불량배 국가(rogue state)’니 ‘테러 국가’ 따위로 부른다. 게다가 각종 국제 합의를 어기고, 심지어 남한과의 합의마저 저버리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몇 나라들은 이 김정일 정권을 혼내줘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별로 뾰족한 수도 없는 것 같으면서 그냥 ‘대화로 해결’하자고만 하고, 때론 김정일 정권을 감싸기까지 하려는 것처럼 비치니,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처신은 국제사회 분위기와는 영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다른 나라들을 우리 코드에 맞추도록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북한을 옹호하며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는 찾기 어렵다. 결국 할 말이 없거나,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해야 한다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도력도 성립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정상외교는 외국 지도자를 만난다고만 되는 게 아니다. 이번 방일 결과를 놓고 ‘무엇 하러 갔나, 현충일도 안 지키고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결국 노 대통령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한 표현이다.

다음에 중국이나 러시아를 찾아가서 좀더 정립된 외교 목표와 설득력 있는 논리를 국제사회에 내놓지 못한다면, 노 대통령의 외교 의욕도 결국 아마추어의 실패로 끝났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chang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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