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버지, 접니다. ” 1963년 어느 날 밤 갑자기 그는 나타났다. 중학교 5학년이던 6·25 때 월북한 조카였다. 숙부는 당황했다. “너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 그는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형은 잘 계십니까?” ▶숙부는 재벌그룹의 사장과 한국경제인연합회장을 지낸 경제계의 실력자였다. 조카가 물은 사촌형은 대한변협회장을 지낸 변호사였다. 갑자기 나타난 조카는 혈연을 이용해 남쪽의 실력자들을 회유하여 공작거점을 만들려는 남파간첩이었다. 숙부는 조카를 설득하고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와 면담토록 해서 그를 전향시켰다. ▶홍상화의 소설 ‘피와 불’은 작가 가족의 이런 실화(실화)를 소재로 한 것이다. 전향한 조카는 이미 북에서 결혼해 딸을 두고 있었다.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던 그 딸은 어느 날 김정일의 눈에 띄어 북한영화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이 되고, 인민배우로서 1원짜리 북한 지폐의 모델이 된 홍영희(47)다. 6촌 남매인 작가 홍상화와 홍영희는 1990년 뉴욕에서 열렸던 남북영화제에서 만나 화제를 뿌렸다. ▶우리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남파된 간첩을 인도주의 이름 아래 석방해준 것은 우리 사회다. 석방된 이들을 북에 송환해주기로 한 것도 우리 사회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의 은덕에 감사하기는커녕 이제와서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이들은 북한송환을 앞두고 어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동지적 의리를 생명으로 여기는 우리는 통일조국을 그리며 지조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모든 동지들이 함께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남쪽에서 혼인한 이들은 가족과 함께 입북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전향서를 썼던 어떤 사람은 ‘강제로 쓴 것이라 무효’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들이야 으레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그들이 개선장군처럼 활개치게 해주는 요즘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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