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통곡이었다. 기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만 개의 바늘과 칼끝이 가슴을 갈기갈기 저미는 아픔이었다. 누가 이들을 그토록 통한(통한)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는가. ” 1983년 6월말부터 장장 4개월 이상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든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 대한 조선일보 사설의 첫 대목이다. 그 때의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너나 없이 밤을 하얗게 새며 이산가족의 극적 상봉과 걷잡지 못하는 오열에 얼마나 가슴아팠던가. ▶그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흐른 요즘, TV와 신문마다 북측이 통보한 이산가족 방문 후보자들에 얽힌 사연들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꿈만 같아요” “살아서 아들을 만난다니…. ” 혈육의 생존사실을 확인한 가족들은 빛바랜 사진들을 꺼내들고 눈물을 글썽인다. “몇개월만 더 사셨어도 그처럼 기다리던 아들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 포옹할 체온마저 식어버린 부모를 떠올리는 가족들의 절규가 가슴을 메이게 한다. ▶6·25 전쟁이 남긴 비극의 끄나풀은 이토록 질기고 상처 또한 깊이 패어 있다. 그러나 남남(남남)끼리의 이산가족 상봉과 달리 이번은 북한의 후보자가 남한의 가족을 방문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컴퓨터로 대상자를 추첨했으나 북측은 ‘성공한 남쪽 인텔리 출신’을 주로 선정했다. 저명한 학자나 예술가가 다수 포함됐고, 이념적 갈등기에 ‘좌익’이었거나 의용군에 동원당한 청년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북한에서 상당한 지위에 오를 동안 남한의 가족들은 ‘연좌제(연좌제)’ 등에 얽혀 말못할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한 법, 어느 할머니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봉의 기대에 부풀었다. 따지고 보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세월의 모진 풍파에 주름이 패고 이산의 고통을 겪기는 매한가지일지 모른다. ▶8·15 상봉까지는 시간이 촉박하다. 우리 모두가 가족을 수소문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게 해주는 것이 도리다. 그러나 감정에 너무 치우칠 일만은 아니다. 서로가 아픈 상처를 위무(위무)하고 못다한 정을 나누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하지만 결코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느 쪽도 ‘금의환향(금의환향)’이 될 수 없는 우리의 분단비극과 혼돈의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