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난다. 비록 예정보다 하루 늦은 만남이지만 그 의미는 여간 중차대한 것이 아니다. 민족사적으로는 상이한 체제에서 오랫동안 서로 적대하고 갈등하면서 살아온 남북의 통치자들이 처음으로 마주앉아 민족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었으며, 현실적으로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지대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 길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다. 쌍방에 도움이 되는 방향의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지나온 역사에 비춰보면 그것은 여간 지난한 일이 아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사고방식, 행동양태, 심지어는 생활양식과 언어습관까지 달라져 있다. 특히 그 동안 북한당국은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권위와 자존심을 내세우며 우세를 유지하려 하는 패턴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짐작케 한다. 그러므로 김대중 대통령의 이번 평양 방문은 그 ‘역사적 무게’에 못지 않게 조심스럽고 부담이 가는 행보이다.

이번 회담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대목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김 대통령으로서는 모처럼 온 기회를 활용해 많은 것을 얻어 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정상회담에 나온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남북관계를 진정으로 개선할 수 있겠는지를 탐색하고 가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이 자주 말했듯이 만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으며 이 만남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금까지의 대남자세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북한이 진정으로 남북대화를 원하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의지가 보인다면 그에 맞게 처신하면 된다. 그럴 경우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방지와 평화정착에 대한 공동선언이다. 남북간에 이산가족문제도 중요하고 교류·협력도 필요하지만 한반도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는가이다. 상시적인 대화채널을 구축해 평화문제를 논의하고 그것이 진전되면 남북에 서로 이익이 되는 문제를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김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에서 밝힌 이산가족 문제에 진전이 있으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김 대통령 일행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성사시킴이 없이 사회간접자본 지원 등 일방적인 경제지원만 약속하는 일이 없기를 많은 국민들은 바란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추호라도 손상을 입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며 한국인의 안녕과 번영을 책임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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