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이산가족 상봉을 하루 앞두고 장충식(장충식)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출국하게 된 것은 정부의 요청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판단’이라는 게 한적(한적)측의 설명이다. 북한측이 장 총재의 월간지 인터뷰 내용을 계속 문제 삼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칫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차질을 줄 우려가 있다는 본인의 판단에 따라 일본측과 사할린동포 영주귀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출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자신이 총재로 있는 것이 ‘이산상봉’에 차질을 준다면 당연히 총재직을 그만두는 것이 이치에 맞지, 일시적으로 외국에 갔다 온다고 해서 문제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적측의 그러한 설명은 궁색한 변명이자 궤변일 뿐이다. 한적 관계자들은 장 총재가 출국한 29일 오전까지만 해도 ‘30일 만찬 주최자는 장 총재’이며 북한의 위협에 영향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해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본행이 결정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예정된 것이라 했지만 장 총재는 일본에 가서도 일본측 적십자 관계자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주일 한국대사관이 그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항간의 저질 코미디도 이 정도 수준은 넘을 것이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북한이 “장 총재는 현장에 얼씬도 하지 말라”며 협박해왔고, 장 총재의 월간지 인터뷰 내용을 북한이 문제 삼았을 때 관계당국이 몰래 사과성 밀서(밀서)를 보냈던 전례로 보아 장 총재의 이번 돌연출국도 ‘본인의 판단’이기보다는 북한의 비위를 맞추려는 정부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우리는 판단한다. 북한의 협박에 정부가 ‘행여나 미움살까’ 하라는 대로 응한 것이며 “대한민국 적십자사 총재직의 거취에 대한 결정권은 북한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이산상봉과 대북관계 개선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을 이처럼 나라와 국민의 최소한의 체통과 원칙까지 내동댕이쳐가면서 ‘구걸’해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협상에는 상대방이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입장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장 총재 문제를 둘러싼 정부의 비굴함과 꼼수는 역겨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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