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당국이 현대의 대북 2억달러 비밀송금 처리문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들의 대남(對南)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이 진실규명에 협조하지는 못할 망정 한국민을 위협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사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현대의 북한측 사업 파트너인 아시아·태평양위원회는 이번 일을 문제삼는 것은 “미국의 대(對)조선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며 불순세력의 반북 모략”이라고 강변했다. 북한은 또 “(이를 문제시한다면) 오직 대결과 충돌, 전쟁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위협했다. 대북 비밀송금의 진실 규명 노력을 저지하려는 의도임이 자명하다.

북한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그동안 자신들이 남한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뒷돈을 받아왔음을 자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앞으로 이것이 끊어질 경우 대남(對南) 관계를 원점으로 돌리겠다는 의사표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한이 그동안 무엇을 위해 남북교류와 협력사업에 응해왔는지를 스스로 입증하는 언행인 셈이다.

북한당국이 비밀송금의 당사자로 출국금지조치를 당한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을 금강산 육로관광 시범 답사에 초청한 것도 한국의 법질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현대의 입지를 강화해주려는 의도로 읽힐 소지가 크다.

북한당국은 남북 정권 핵심부의 베일 속에서 은밀하게 추진되는 뒷거래식 남북교류가 더이상 자신들에게도 도움이 되기 어렵게 됐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비밀 뒷거래가 당장은 현금 확보에 유리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엔 건전한 교류의 기반마저 허물게 될 것이다. 북한당국이 이번 일에 부당하게 개입하면 한국민들의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불신만을 증폭시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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