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11일 이른바 ‘총풍 사건’에 대한 1심 선고를 통해 ‘무력시위 요청’의 실체를 인정했다. 그러나 배후 여부에 대해선 “기록상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혀 ‘주연 배우’는 있지만 연출·지휘한‘감독’은 드러나지 않은 사건이 됐다.

재판부는 한성기, 오정은, 장석중씨 등 ‘총풍 3인방’이 지난 대선 직전인 97년 12월 중국 북경에서 북한측 인사들을 만나 휴전선 주변에서 무력시위를 요청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들의 행위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인 선거제도에 대한 중대한 침해인 동시에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끼친 범죄”라고 재판부는 밝혔다.

재판부는 또 한씨 등이 안기부·검찰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한 데 대해 직접적인 판단은 유보했지만 검찰 조서를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수사과정에서의 적법성 논란을 잠재웠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번 사건의 핵심 중 하나였던 한나라당 이회창(이회창) 총재 및 동생 회성(회성)씨와의 연계 여부에 대해서는 공소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판결문에선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기자들에게 배경 설명을 통해 피고인들이 한나라당에 대선 보고서를 전달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총격 요청과 관련해 사전·사후 보고를 했는지는 판단할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연계 여부에 대한 명시적인 범죄혐의가 없는 만큼 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려야 할 사안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98년 10월 말 수사결과 발표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 연계의혹’의 근거를 이례적으로 상세히 설명해가며 “계속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를 입증하지 못한 셈이 됐다.

또다른 쟁점이었던 권영해(권녕해) 전 안기부장의 특수직무유기 혐의 부분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번 사건에 국가기관의 개입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권 전 부장이 한성기·장석중씨를 98년 12월 12일 조사, 이번 사건을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이회창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 암장(암장)’을 기도한 혐의가 있다고 했지만, 법원은 “적극적으로 자료를 폐기하거나 은폐하려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한씨 등을 조사하고 기록을 보존한 점 등으로 미뤄 이 총재측에 유리하게 하려는 고의성이 없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다.

한씨 등의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안기부가 개입했다는 검찰의 사건 구도를 법원이 깬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명진기자 mjlee@chosun.com

총풍사건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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