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1일 북측 가족을 만나고 나온 남쪽 가족 6명과 현장에서 긴급 좌담을 마련, 상봉 과정에서 느낀 심정과 상봉제도의 개선점 등을 들어 보았다.

좌담에는 림순응(65·평양외국어대 연구사)씨의 동생 임순자(54·소설가)씨, 리석균(72·전자자동제어기 사장)씨의 동생 이석춘(51·전직 교사)씨, 정재갑(66·전 군장성)씨의 동생 정재국(57·청주)씨, 김기만(71·화가)씨의 조카 김완(51·운보 김기창 아들)씨, 이종원(71·전 김일성대 강좌장)씨의 동생 이종균(61)씨, 하재경(65·김책공업대 강좌장)씨의 형 하재인(73·서울 서초동)씨가 참여했다.

자연스레 50년 만에 만난 가족들을 본 첫 느낌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왔다.

이석춘:중2 때 찍은 형님 사진만 보다가 직접 보니 그 앳된 얼굴이 저렇게 변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반세기나 헤어져 서먹서먹하지 않을까 걱정도 없지 않았지만,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재인:우리 동생은 전에는 내성적이었는데 지금은 자신감에 차 있고 활달하게 바뀐 것 같아요.

이종균:94년 북경을 통해 형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편지도 3회 보냈지만, 진짜 살아계실까 하는 의심도 없지 않았어요. 직접 만나고서야 살아계셨음을 실감했어요.

정재국: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만나선지 어쩐지 어색한 순간도 있었어요. 형님은 이따금 북한을 찬양하는 듯한 이야기도 했어요. 그 쪽에서 50년을 사셨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 그럴 때마다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김완:작은아버님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면서 ‘형님(운보 김기창)도 북한에서 장군님 음덕을 입어야 하는데’라는 말씀을 자주 했어요. 처음엔 모른 척하다가 나중엔 억지로 화제를 바꿨습니다. 이번에 가지고 온 병풍의 그림도 체제 찬양 성격을 담은 것이라고 들었어요.

하재인:동생이 만나자마자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장군이 무의무탁한 사람을 교육시켜주고 대학교수까지 할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는 말부터 꺼내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죠.

임순자:어쨌든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헤어지기엔 일정이 너무 짧아요. 게다가 그런 찰나 같은 만남에 체제 이야기로 분위기가 어색해져 울적했어요. 가족 이야기를 좀더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정재국:두어 번 짧게 얼굴만 보고 다시 헤어져야 하니 너무 가슴 아픕니다. 같이 살지는 못하더라도 때 되면 오가며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날이 올까요?

하재인:함께 잘 수 있으면 좋겠어요. 호텔보다도 집에서 만나면 좋을텐데….

이종균:일정 자체가 1차 상봉 때보다 하루 줄어든 데다, 비행기까지 늦게 와 첫날은 너무 빡빡했습니다. 방문자들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어요.

이석춘:상봉자 수를 늘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2차 상봉자 명단에 포함됐지만, 아직 기약도 없는 이산가족들이 너무 많아요. 상봉 방식도 한정된 장소에서만 만날 게 아니라, 친지 집에도 가고 선산도 찾을 수 있게 해주면 좋겠지요.

이종균:극소수만 참가하는 상봉은 무의미해요. 이벤트성 만남보다는 서신 교환이나 면회소 설치 등을 통해 마음대로 소식이라도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리=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김기홍기자 darma90@chosun.com

/김민구기자 roadrunn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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