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당선자의 첫 시험대는 북핵(北核) 문제다. 사실 이 문제는 1994년에 이미 한 번 출제됐던 문제다. 그렇긴 해도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크게 변했다. 문제가 달라졌다는 게 아니라 문제를 둘러싼 상황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직접적 계기는 미군의 무한궤도차량에 치인 두 여중생의 참변이다. 주한 미국대사관을 전투경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벌써 눈에 익어 버렸다.

한국 방위를 위해 이 땅에 주둔한 미군기지를 한국경찰이 방위하는 진풍경도 이미 낯설지가 않다. 교회와 성당과 절에서 핵과 한·미관계라는 생소한 안보 이슈에 대한 설교와 강론이 이어진다.

세상이 변하면 혼돈이 따르는 게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북핵 중재론도 그 중 하나다. 당사자가 제3자라도 되는 양 시치미를 떼고 있는 모습은 외신(外信)들에게 안성맞춤의 스케치 기삿거리를 제공했다. 지도급 인사들의 언동은 아래로 전염된다. 북핵문제는 어느 새 ‘민족’과 ‘동맹’ 간의 갈등으로 단순화돼 퍼져나가고 있다.

냉전, 탈냉전, 탈냉전 이후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국민이 민족과 동맹 간의 딜레마로 끼어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핵문제에 관한 남북공조와 대미투쟁을 고취한 북한의 신년사도 바로 이 틈새를 짚은 것이다. 이것이 노 당선자가 북핵과 대미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지금의 상황이다.

그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그가 도출해낸 해법(解法)은 아직 출범조차 하지 않은 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미리 규정해 버릴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현재의 혼돈은 정리돼야 마땅하다. 그 정리작업은 우리들의 천진난만한 민족관과 순진무구한 동맹관을 점검하는 데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혈맹(血盟)이란 피를 함께 나눈, 그리고 피를 함께 흘린 사이라는 뜻이다. 혈맹 하면 으레 미국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몇십 년 전이다.

한국전쟁에서 3만4000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5만8000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눈을 감았던 베트남의 정글과 논바닥을 한국청년들도 함께 뒹굴었다. 그런데도 혈맹 하면 미국인들은 영국을 떠올린다. 한국의 순서는 저 아래다. 섭섭할 게 없다. 그들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같은 참호에서 견뎌냈다.

두 전쟁에서 미군은 11만7000명과 40만명이 전사했다. 영국군 90만명과 39만7000명은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은 1991년 걸프전,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어깨동무를 했고, 올해도 이라크의 사막을 같이 행군할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피를 함께 흘린 적은 있지만 피를 같이 나눈 사이는 아니다. 그들은 다르다. 앵글로 색슨의 피가 서로 흐르고, 민족을 묶어준다는 언어를 공유하고, 민주주의적 질서를 그 옛적부터 함께 신봉해 왔다.

20세기 초 영국의 정치인 밸포어의 연설은 이런 맥락에서 들어야 이해가 간다. “나는 남미문제로 미국과 이해관계가 대립했을 때 미국과의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전(內戰)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같은 혐오감을 갖는다….”

이제 이 철벽의 동맹, 한 핏줄 한 문화가 결합한 민족과 동맹의 실상으로 눈을 돌리자. 2차대전에서 영국이 나치 독일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미국 덕분이다. ‘무기대여법’이란 이름으로 제공한 차관으로 무기와 식량과 기름을 사왔다.

그러나 이 차관은 일본이 항복한 다음다음날 끊기고 말았다. 그 순간 영국의 전력 공급은 중단되고, 식당의 요리는 세 접시로 제한됐다. 미국이 매몰차서가 아니다. 전후 미국의 세계전략과 국익이 영국과 달랐던 것이다.

역사는 영국이 세계정치 주역의 자리에서 퇴장한 것을 1956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영국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에즈운하에 출병(出兵)했던 해다.

미국의 반대는 출병 반대성명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뉴욕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貨)를 무더기로 팔아치웠다. 파운드화는 폭락했고 즉각 영국은 손을 들었다. 믿었던 미국의 배신에 영국의 반미(反美) 분위기는 들끓었다.

그러나 미국은 거기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1960년대를 향한 미국의 세계전략과 국익이 영국과 달랐던 것이다. 이제 우리 문제로 돌아갈 때다. 민족은 동맹보다 진한가. 아니다. 그럼 동맹이 민족보다 강한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인가.

민족과 동맹을 합해도 그 나라의 국익(國益), 그 나라의 전략적 이익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이 진실을 바로 보고, 이 진실을 국민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이 북핵(北核)문제를 풀어가는 첫걸음이다. /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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