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사회부 차장대우congchi@chosun.com

작가 이청준(李淸俊)의 소설에는 ‘전짓불’이 곧잘 등장한다. 깜깜한 밤중 지리산 자락의 민가로 들이닥친 불청객 무리. 곤하게 잠든 주인을 발로 툭툭 깨워, 전짓불을 들이대며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다. 전짓불을 쥔 자들은 빨치산일까, 국군 토벌대일까. 잠도 덜 깬 상태에다 어두워 식별할 수 없다. 한 번 잘못 선택하면 곧장 황천(荒天)으로 갈 판이다. 이청준의 ‘전짓불’은 어느 한쪽의 선택을 강요 받는 시대의 숙명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휴일 소파에서 뒹굴던 기자도 유사한 상황에 봉착했다. 초등학생 아들놈이 다가와 뜬금없이 “북한은 우리편이에요 남의 편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런 뒤 기자의 입술이 한시 바삐 떨어지기를 올려다봤다. 초읽기에 몰린 심정이었다.

이분법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유치하고 혹 위험하다. 의식 수준이 저급할수록 이분법의 장악력은 커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가피한 이분법의 존재 이유도 있다. 이분법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일이 따지고 토론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고, 많은 경우에 선악(善惡)의 판단 기준이 된다. 성장기에는 의식의 교통정리를 자동으로 해주는 신호등에 비유될 수 있다.

유년 시절 영화를 보면서 우리 편이 누구인지를 가려 내지 못하는 동안 심리적 불안을 느꼈던 기억을 한번쯤 갖고 있지 않는가. 기자의 아들놈도 아마 그러한 정신 발달 단계에 와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류의 질문에 확신이 없다면, 모호하게 응수하는 게 최상수다. 기자는 “우리 편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남의 편이라고 할 수도 없고…”라는 식으로 둘러댔다. 아들놈은 아비에 대해 실망한 눈치다.

굳이 변명하자면, 북한이 어느 편인지에 대해서는 정치권과 국방부에서도 명쾌하게 풀지 못했다. 올 초 국방 백서에 명시된 ‘주적’(主敵) 개념을 둘러싼 소동이 그 예다. 핵심은 역시 ‘북한이 우리 편인가 남의 편인가’로 집약된다. 공방이 떠들썩하면 결론은 없는 법이다. 군(軍)은 2001년 국방백서의 발간을 무기연기함으로써 아예 질문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사실 북한은 놀라운 변신술로 이 땅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혼을 빼놓은 감이 없지 않다. 아무리 빠른 눈을 가져도 북한의 정체를 종잡기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넉 달 사이에 일어난 것만 보자.

서해안에서 우리 고속정을 벌집으로 만들고 꽃 같은 젊은이 5명을 숨지게 만든 뒤, 아시안 게임에서는 북한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다. 브라스밴드를 포함한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이 내려온 것이다. 서로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하나, 통일 조국!”이라고 합창했다.

부산 앞바다에 북한 선박이 스무날 가까이 머물렀을 때, 한 문인은 “우리가 저녁상을 대하는 동안 바로 저 배 안에서 그들도 저녁을 먹겠지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온기(溫氣)가 채 식기도 전에 북한의 핵무기 개발 소식이 터져 나왔다.

숱한 채널을 통해 북한을 알려는 것은 우리의 실제 삶과의 관계 때문이다. 도서관에 소장될 지식 축적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우리 편이냐, 남의 편이냐”라는 숙명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노미’ 현상이란 성장 과정에서 사회 적응에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한다. 북한 적응에 관한 한 우리 사회 전체는 심한 아노미 현상에 빠져있다. 당장 우리 자녀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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