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94년 핵위기를 방불하는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북측의 핵무기 보유 절대불용이나 강제적이고 즉각적인 사찰 실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심지어 전쟁 불사론까지 공공연히 거론되는 현재 상황은 마치 시계바늘이 되돌려진 것처럼 몇 년 전과 흡사하다.

그런가 하면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내부 분위기도감지된다. 북측이 핵무기개발 계획을 시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어제국내 증시는 폭등세를 보였다. 정치권이나 정부의 긴박한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일상생활에서는 별다른 동요나 긴장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남북 장관급 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도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점이다. 공교롭게도 회담 개최 직전에 북ㆍ미 회담내용이 공개되는 바람에 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됐던 것이 사실이다.

당초 합의대로 평양에서 8차 장관급 회담을 진행하기로한 것은 남북관계가 과거보다는 한 단계 성숙했음을 과시하는 동시에 과거와는 다른방식으로 골치아픈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북측의 핵무기 개발계획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세밀히 들여다 보면아직도 미심쩍은 구석이 남아 있다. 우선 북측이 무엇을 `시인'했는지조차 100% 확신하기 어렵다.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인했다는 주장은 엄밀히 말해 미국의 일방적주장이며 진실의 반쪽을 쥐고 있는 북측에서도 그것을 인정해야 완전한 진실로 된다.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 계획인지, 지금 전해지고 있는 대로 핵무기개발 계획인지가 우선 명확히 가려져야 한다. 그 계획이 있다면 진척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에대해서도 북측은 솔직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은 남북 모두핵재처리시설은 물론 농축시설도 보유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북 당국이 `핵주권' 포기라는 거센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합의를 했을 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아무런 사전 협의도 없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겠다고 한다면 그 동안 어렵사리 쌓아온 신뢰관계에 큰 흠집을 남기게 된다.

북측은 농축 우라늄 핵무기 개발계획이 있는지, 비핵화 공동선언의 준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 최소한 미국 쪽에 밝힌 정도는 남측에도 알려야 상처입은 신뢰관계의 회복도 가능할 것이다.

약 10년 전 핵위기는 전쟁 일보 직전으로까지 치달았다. 미국의 영변 핵시설 단지에 대한 폭격 계획을 우리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핵무기를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는 식의 감정적 접근으로 핵협상에서 소외를 자초하면서 정작 해결비용부담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떠맡는 것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핵문제 해결에 남북이공조하지 않으면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비극적 사태가 닥칠 수 있고 남북 모두 명분도 실리도 챙기지 못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만 상대하겠다는북측의 입장이나 미국, 일본과만 공조하겠다는 남측 태도 모두가 바뀌어야 민족 전체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 이번 장관급 회담을 계기로 남북 간 신뢰를 복원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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