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이나 명문의 논설도 ‘편집’이란 마법의 상자를 빠져나와야 독자와 만난다. 편집부는 무형의 정보를 유형의 신문으로 바꿔놓는다. 기사에 가치를 부여하고 지면을 독자 친화용으로 꾸미고 포장한다.

“조선일보는 60년대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편집에 우선 순위를 두고, 지면의 개선과 비주얼화에 모든 노력과 정성을 쏟았다. ” 방우영(방우영) 회장의 ‘조선일보와 45년’에서의 회고다. ‘편집의 조선일보’라는 성가는 자연스런 결과다.

일제하에 조선일보는 한국 민간신문의 편집 모델을 제시해 나갔다. 제호나 기사, 제목 배치에서부터 사진 사용까지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은 일제에 대한 저항, 조선인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가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창간된 20년 6월 8일 사회면 머리기사는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이란 제목 아래 ‘골수에 심각(심각)된 대혈한의 진수(진수)’란 부제를 달았다. 이 기사는 시리즈로 10회에 걸쳐 연재돼, 나중에 1차 정간의 간접적 이유가 되기도 했다.

광복 후, 조선일보 편집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4·19였다. 언론사에 남을 대담한 편집이 4월 19일자 1면에 등장했다. 세로 7cm, 가로 4cm 크기의 큰 활자로 ‘전 대학생(대학생)이 총궐기(총궐기)’란 제목을 3단 전단으로 뽑았다. 언론사상 ‘최대’의 1면 제목이었다.

조선일보는 70년대에 이미 편집부 기자들의 해외연수를 시작했을 만큼 편집을 중시했다. ‘여기는 평양, 가랑비가 오고 있다’. 72년 8월 30일 1면 머리기사는 이런 시(시)적인 헤드라인을 달았다. 분단 후 남측 사회단체-취재진이 처음 북한 땅을 밟고, 남북적십자 회담을 하게 된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명 제목.

84년 11월 30일자, 김대중 당시 출판국장(현 주필)이 쓴 ‘동서남북’ 칼럼 제목 ‘거리의 편집자들’은 지금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다. ‘1단 기사와 빨간 줄의 의미’란 부제를 붙여 전두환 정권하의 언론자유 침해를 비판한 동시에, 당시 편집자들의 자괴어린 심정을 잘 담아냈다. 88년 총선에서 야당 의석수가 여당보다 더 많아지자, 조선일보는 ‘여소야대(여소야대)’란 함축적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이 말은 한동안 당시 한국 정치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 말로 전 언론에 유행어가 됐다.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참사를 보도한 93년 7월 27일자 1면 제목은 ‘45명 살았다’였다. 다른 신문들은 사망자수를 보도했지만, 조선일보 편집자는 절망 속에 희망을 이야기했다. ‘나라가 이 지경…서울이 부끄럽다’란 제목, 그리고 참혹하게 붕괴된 거대한 다리의 모습을 담은 대형 사진─.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알린 94년 10월 22일자 1면은 사진과 레이아웃, 제목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모범 편집으로 지금도 평가받는다. 97년 4월 4일 첫선을 보인 테마신문 ‘레인보우’는 요일별로 주제를 달리해 ‘Culture 21’ ‘뉴스 인 뉴스’ ‘자유시간’ ‘NOW’ 등의 면머리를 설정, 서구형 편집 스타일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면으로 드러난 제목이나 레이아웃 외에 편집의 컴퓨터화, 자동화에도 조선일보는 남다른 관심을 쏟아왔고, 언제나 그 선두에 섰다. 92년 조선일보사는 정보혁명화를 선언하고 제4세대 CTS(컴퓨터 조판 시스템) ‘코러스(CHORUS)1’을 도입, 납활자와 잉크, 원고지와 펜을 신문사에서 추방시켰다.

지난해에는 이 시스템을 발전시켜, ‘C3 체제’를 완성했다. 기자 한 사람이 지면 레이아웃과 제목 다는 일은 물론, 조판(조판)이라 불리던 과거 공무국 작업까지 100% 처리하는 1인 편집-조판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C3’는 속도뿐 아니라, 다양하고 화려한 편집 테크닉까지 동원할 수 있는 첨단 기능도 가졌다. 시대를 반영한 명 제목, 절묘하고 미적인 레이아웃, 그리고 ‘C3’의 개발은 결국 ‘독자에 대한 고품질의 지면’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진성호기자 shjin@chosun.com

/이지형기자 jihy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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