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慶珠

“글쎄요. 남남북녀라는 말도 이젠 옛말이네요. 저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하며 전혀 때묻지 않은 남성미. 자연 그대로인 미남들 아닙니까. 참 북한 남자선수들 어쩜 저렇게 잘 생기고 늠름한지. 그 미모에 다시 한번 선전을 기대해 봅니다.”

만일 이 같은 글이 신문·TV를 비롯한 모든 미디어에 한동안 거의 매일 반복된다고 상상해 보자. 외모에 대한 이러한 노골적인 관심에 우리는 곧 낯뜨거워질 것이다. 그럼 왜 북한 여성들의 외모에 대한 판에 박힌 듯한 칭찬들은 우리에게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아니 아시안게임에 관련이 없어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쁜 얼굴만이 그들의 전부인 양 미디어에서는 ‘역시 남남북녀’를 들먹여 왔는데 말이다. 아니 훨씬 더 적나라하게 화장술서부터 가꾸기‘론’을 소개하고 결국 그들과 OOOO이라는 선호되는 가슴과 다리를 표현하는 저속한 용어가 신문에 보란 듯이 함께 거론되었는데 말이다. 여성의 미에 대한 담론은 아직 우리 사회의 중요한 관심사이며 가치관에 깊이 관여되어 있어서 이런 집착마저 자연스럽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고체계를 포함한 문화는 서로를 성립하고 변형시키는 상호관계를 끊임없이 지속해 나간다. 그러나 사고체계에 영향을 주는 많은 매개체들이 불행하게도 시대가 새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시점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빛바랜 시대의 언어를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사고방식이 자리잡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방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푸코(Michel Foucault) 같은 학자들이 권력의 남용과 지식과 언어의 관계를 사회개혁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는 그 사회의 가치관을 성립해 나가기도 하지만 그 가치관에 의해 변하고 그 가치관을 지속시키는 도구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리거레이(Luce Irigaray) 같은 여성학자들이 언어를 개혁하지 않고는 여성운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성과 같은 수많은 용어나 개념은 남성중심주의라는 가치관이 성립시킨 것인즉 이런 용어, 개념, 언어, 심지어는 문법이 바뀌지 않은 채 가치관이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용되고 있는, ‘유통’되고 있는 언어는 그것을 형성시켜준 사고체계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우리는 이러한 통제에 오히려 익숙해져 닳고 닳은 그릇된 언어와 가치관을 답습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양국 정치인들의 의도가 어떻든지 이제 역사의 흐름은 통일이라는 물꼬를 트는 쪽으로 흐르고 있고 아무도 이 물살을 막을 이는 없을 것이다. 점점 많은 북한 남녀가 우리나라를, 또 남한 남녀가 북한을 오고 갈 터인데, 통일 한국으로서의 새로운 사고체계를 위한 무수한 담론이 생겨날 터인데, 그것의 첫 사례들이 북한 여성들의 외모를 항상 주요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개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여성들이 여러 가지 굴레를 벗어났다는 지금, 그리고 그 결과로 경제적인 자유로움과 어느 정도의 여권 신장을 자부할 수 있다는 지금, 우리나라 젊은 여성의 70%가 외모가 자신의 삶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지 않는가! 덕담(德談)이 지나쳐 그들에게 마치 우리 나라에선 외모가 한 여성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암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러한 시선과 집착이 그들의 가치관과 자아를 옭아매지는 않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고체계에 깊이 뿌리박은 낡은 언어의 뿌리를 뽑지 못한 치부를 무의식 중에 미디어라는 공적 거울을 통해 비추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나친 덕담이라고 끝까지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숙명여대 교수ㆍ영문학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