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3일, 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아 남한의 정당·단체 대표들과 각계 인사들을 평양에 초청한다는 편지를 판문점을 통해 보내왔다. 북한은 과거에도 비록 형식과 명칭은 달라도 꾸준히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방식의 정치회담을 제의해왔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이후 변화하고 있는 남북관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향후 우리 내부적으로,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적지 않은 논란과 파장이 예상된다.

우선 6·15 공동선언에 따라 남북간 각종·각급의 회담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북한이 정당·단체 및 개별인사 회동과 같은 정치행사를 되풀이 제안한 것은 남북정상회담 이전부터 북한이 강조했던 ‘근본문제’를 본격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남북한은 6·15 공동선언의 배경과 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왔는데 그 핵심적 차이는 바로 공동선언의 제1항과 2항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남북 평화공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교류·협력에 치중할 것을 주장한 반면, 북한은 단합과 통일을 위해 6·15 공동선언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제1항과 2항을 선언적 또는 북한의 내부용으로 파악하는 우리는 교류와 협력을 상당기간 동안 추진함으로써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간에 신뢰가 구축된 연후에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대규모 지원과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북한은 경제와 인도주의적 사안을 실리 획득 차원에서 이행하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병행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 더구나 최근 북한의 각종 보도나 결의문 등을 볼 때 연합제와 ‘낮은 차원’의 연방제 사이에 공통성을 살려 1국가체제를 조속히 마련하는 데 오히려 더 많은 비중을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같은 남북한 ‘정치행사’를 북한 노동당의 창건 기념일에 맞춰 추진한다는 것은 북한의 전통적인 통일전선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한나라당은 거부의 입장을, 그리고 자민련과 민주당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유보적 태도를 보이고 있고, 초청 대상인 단체 및 개별인사들 간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이를 모를 리 없는 북한이 이같은 민감한 시기에 맞춰 초청행사를 벌인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내부분열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남북관계가 표면적으로는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제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여론은 날이 갈수록 첨예하게 대립되고 갈등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북한의 정부·정당·단체대표 합동회의 초청에 응해 평양을 방문하는 남한의 정당·단체 및 개별인사들이 평양에서 북한측과 어떤 논의를 어떻게 전개하든 관계없이, 우리 남한에서는 연공연북세력과 그 반대세력으로 나뉘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그동안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던 ‘주한미군 철수’ 및 ‘보안법 철폐’ 등의 주장을 철회했다는 우리 측 판단은 희망사항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내부에서 이미 주한미군의 철수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고, 정부·여당이 보안법의 전면적인 개정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앞장서 이를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빌미로 평양 정치행사를 개최함으로써 ‘해내외 각당, 각파, 각계각층과 연대하고 단결을 강화’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남한내 ‘통일애국활동’의 활성화를 보장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평화공존을 통해 남북간의 신뢰가 싹도 트기 전에 ‘통일’로의 정치적 행보가 가속화되는 계기로서 ‘정치행사’가 진행된다는 점에 대해 우리 정부는 각별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관련 정당, 단체 및 개별인사들도 신중하게 처신하여야 할 때이다.유 호 렬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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