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일본총리에게 “대남(對南) 공작을 위해 일본인들을 납치했다”고 사과하면서도 정작 남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미안한 기색마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참담한 자괴심을 안겨준다.

그의 이런 태도는 남한을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우습게 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성도 떨칠 수 없다.

더욱 해괴한 것은 김정일이 남한을 목표로 한 범죄사실을 자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국가차원에서 저지른 납치와 테러가 우리를 겨냥했음이 그 최고책임자의 입을 통해 명명백백히 드러났음에도 왜 현정부는 침묵하고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의 납치공작에 희생당한 건수(件數)만 따지더라도 우리는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아닌가?

김정일이 털어놓은 사실은 명백한 ‘국가범죄’이며, 북한정권의 진면목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그의 ‘자백’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미화하는 듯한 움직임마저 보이는 것도 우려할 만한 추세다. 이런 경향은 그에게 과거 범죄행위에 대해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기존의 일부 주장과 상통한다고밖에 볼 수 없으며,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다.

차제에 그동안 아웅산 테러나 KAL기 폭파사건 등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 내부 음모라는 일부의 황당한 주장이 얼마나 북한의 실체를 호도한 ‘범죄적’ 행위였는지에 대해서도 통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나마 이번에 김정일이 범죄사실을 시인한 것은 일본 국민과 정부의 단호한 원칙과 협상자세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뼈저린 교훈이 돼야 한다.

일본은 “국민이 납치됐는데도 수십 년간 방치한 국가를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 또 ‘납치국가’와 어떻게 수교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인식이 국민여론을 하나로 만들었고, 북한과의 수교협상도 중단하는 결의를 보여 결국 북한의 시인과 사죄를 받아냈다.

수천, 수만 명이 북한에 납치 또는 억류돼 있는 우리는 그동안 어떤 자세를 가져왔는지 부끄러운 일이다. 북한은 지금이라도 즉각 우리에 대해서도 각종 납치와 테러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피랍자들을 돌려보내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현정부도 이 일을 대북문제에서 최우선의 과제로 끌어올려야 한다.

북한당국은 납치시인이 문제의 최종해결이 아니라, 시작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북한이 일본에 대해서만 납치문제를 인정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계속 부인과 무시로 일관한다면 그들의 ‘변화’는 일시적 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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