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인지 모르겠다. 2년 전 평양에서 김정일과 얼굴을 맞대고 한 이야기를 정작 상대방은 “80%만 알아들었다”고 뒤늦게 털어놓았으니 말이다. 김정일은 “남조선말에는 영어단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다”고 불평해, 김 대통령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게 영어 때문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작년 7월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을 밀착 수행했던 러시아 고위관리가 최근 펴낸 책에서 밝힌 대목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했던 황원탁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통역이 필요치 않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후일담을 듣고 보면 차라리 통역(?)을 쓰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를 일이다. 정상회담 후 ‘연합제·연방제’나 주한미군 문제를 놓고 남북간에 서로 다른 말들이 나온 것이 설마 ‘20% 언어 불통’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김정일이 알아듣지 못한 ‘20%’가 그의 이야기대로 김 대통령의 영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김 대통령이 평소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스타일도 아니고, 설혹 그랬더라도 북한 최고 엘리트코스를 밟은 김정일이 그 정도 영어단어를 모를 리 있겠는가. 문제의 ‘20%’는 아마도 김정일 스스로 체감한 남북한 언어차이 지수일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김 대통령의 과거 감옥생활 이야기는 김정일에게 상당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모양이다. 그는 김 대통령으로부터 “감방에서 자살하고 싶었지만 주위 사람을 생각해 참았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영화광답게 “감옥에서 청와대까지 간 생애를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김 대통령이 하필이면 남한에서 감옥 간 이야기를 굳이 김정일 앞에서까지 한 뜻이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김정일로서는 ‘언어소통’ 이상의 그 무엇을 느낀 듯하다.

▶‘절대자’로서의 김정일의 면모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82년부터 금연을 시도한 그가 거의 20년 만인 2년 전 담배를 완전히 끊자 북한 고위 장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고 한다. 북한 노동신문이 흡연의 해악을 알리면서 금연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그나마 그가 ‘금연 포고령’을 내리지 않는 것은 금연의 어려움을 절감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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