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평양에 도착한 고이즈미 일본총리의 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실무적이고 냉정한 태도다. 그의 말과 몸짓은 절제돼 있었고, 표정에서는 감정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처음 대면했을 때 한손으로 가벼운 악수만 건넸을 뿐이었고, 점심식사도 따로 했을 정도다.

이같은 태도는 이번 평양행을 일·북 간 중요 현안에 대한 정상 간 담판의 기회로 삼을 뿐, 불필요한 정치행사로 확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일본측 보도에 따르면, 이런 ‘냉정한 협상’ 전략을 세우는 데 있어서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고 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행적을 검토한 결과, 북측이 미리 마련해둔 화려한 의전 및 깜짝행사에 흥분할 경우 북한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고, 또 배석자 없는 정상 간 단독행사는 정치적 위험이 큰 만큼 이를 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측이 정상들만 있는 상황을 없애버린 덕분에 김정일 외교의 전매특허처럼 굳어진 ‘깜짝쇼’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실 김정일처럼 외교의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는 인물과 회담을 하게 될 경우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는 방법이 안전하고 또 효과적인 길이다. 이는 과거 동·서독 회담을 비롯, 세계의 다른 사례에서도 확인된 일이다.

북한 다루기에 관한 한 최고임을 자부하는 김 대통령이 거꾸로 ‘해서는 안 될’ 교훈의 참고사례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DJ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여실히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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