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혁명인지, 아니면 개혁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한 좌파 지식인은 얼마 전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마지막 보루인 조선일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을 냈다. “이승복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사는 작문이 아니다”는 판결을 내린 판사는 일부 언론의 조롱거리가 됐다. 서해교전 때는 한반도의 분쟁은 남한이나 북한의 어느 한쪽이 아니라 제3자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어 온 통념과 양식에 대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지난 50년 동안 걸어온 길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세력은 그들의 사상과 근접한 사람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 중 하나가 됨으로써 고무되어 있다. 그들은 지금 우리 사회가 ‘혁명 전야(前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혁명’ 대신 ‘개혁’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짙은 영향을 드리우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피하면서 반대편을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현대사나 남북관계, 대미관계, 언론문제 등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살펴보면 궁극적인 지향점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혁명’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 사회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지난 50년간의 우리 사회의 특징은 ‘개발독재’와 ‘반공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이 도발한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압축적 근대화’란 과제에 당면했을 때, 또 무력적화통일(武力赤化統一)을 목표로 내걸고 있는 집단이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개발독재’와 ‘반공체제’가 아닌 다른 어떤 길이 가능했는지는 좀 더 깊이있고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어쨌든 1980년대 말 이후 우리 사회는 변화의 궤도에 들어섰다. 그동안의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고 사회적 자유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외부의 엄청난 새로운 흐름은 우리의 끊임없는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분단상황은 계속되고 있지만 냉전이 종식되고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승패가 분명해짐에 따라 남북관계도 상당한 변화가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혁명’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 ‘각 방면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달한 1류 국가’라면, 과연 80년대의 구좌파적 인식에 바탕을 둔 ‘혁명’으로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혁명’을 폭력이 아니라 선거로 이루겠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의 혁명적 재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고 난 후에 국민의 지지를 호소해야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주류도 해야 할 과제가 있다. ‘혁명’을 반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기존 체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시대 상황에 맞게 우리 사회를 재구성해서 ‘업그레이드된’ 체제를 만들려는 비전을 보여주어야 한다.

21세기 첫 번째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우리는 ‘혁명’과 ‘개혁’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앞으로 상당한 기간 우리 역사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李先敏문화부 차장대우 sm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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