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영변 위기, 금창리 위기, 대포동 위기라는 세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영변 위기의 절정이었던 94년 6월은 전쟁전야를 방불케 했다.

90년대 한반도의 주기적 핵·미사일 위기는 북한의 탈냉전 생존전략과 미국의 핵 비확산정책의 충돌로 첫 국면을 맞이하고 양국의 위협외교 속에서 절정을 이룬 다음, 최종적으로 상호 이익의 조정국면을 맞이하는 주기성을 보여왔다.

21세기 한반도에서 핵·미사일 위기의 주기성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판단은 북한의 21세기 청사진인 ‘강성대국론’과 미국의 21세기 비핵화정책의 방향을 보여주는 ‘페리 보고서’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가에 달려있다.

98년 8월 22일 노동신문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강성대국론은 21세기 북한의 국가목표로서 사상·정치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의 3대 기반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사상·정치와 군사강국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그 한계 내에서 경제강국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보면, 주민의 상당수가 기아선상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미사일의 연구개발과 생산에 상당한 경비를 지출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보일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강성대국론의 대표적 상징이며, 따라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금창리와 대포동 위기가 커져가는 속에 한반도 핵문제를 재검토하고 정책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조정관의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된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은 현상유지, 북한붕괴, 북한개혁, 북한매수정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대안으로 한국·일본과의 긴밀한 협조 속에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으로 2단계 전략을 제안했다. 이 보고서는 1단계로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면 미국이 북한과 평화구축을 포함하는 포괄적 관계개선을 기꺼이 추진할 것이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2단계 전략으로 핵·미사일 위협을 봉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강성대국론의 북한과 페리보고서의 미국이 어떻게 21세기에 만날 것인가에 따라 한반도 핵·미사일 위기의 반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단기적으론 북한은 일시적으로 대포동 2호의 실험발사를 연기하고, 미국은 대북경제제재를 풀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미국과 북한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측에 자신들의 21세기 생존목표인 강성대국의 상징물을 포기토록 하기가 힘들며, 북한은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금전용이나 위신용이 아닌 생존용으로 강하게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미국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에서 대북정책에 관한 현실론과 이상론간에 더 본격적인 논쟁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한편 페리안(안)이 큰 차질없이 이행되더라도 공식적 남북 관계개선의 가능성은 높지 않으며, 오히려 북한은 미국을 비롯해 일본·유럽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이룰수록 한국정부와의 실질적 관계개선을 늦추려 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페리보고서 이후 제4의 핵·미사일 위기를 맞지 않으려면 페리보고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북 복합전략구상이 필요하다. 이 같은 구상의 핵심은 비공세적 억지체제, 정치전에 대한 선의의 무관심, 그리고 소박한 남북 관계개선이 아니라 21세기 북한체제의 운영 효율화를 위한 교류협력의 강화를 더 균형감있게 추진해야 한다.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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