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源
/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2일 유엔 연설을 통해 ‘문명’ 대 ‘폭군’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라크 공격을 밀어붙이고 있다. 1990년 걸프전 때처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한다는 반듯한 명분도 없고 국내외의 반대여론도 거세지만, ‘유엔이 못하면 미국이 하겠다’는 자세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미국은 왜 그런 반대와 비난을 감수하면서 ‘가능성’과 ‘의혹’만을 갖고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고 있는 것일까?

9·11테러가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는 “폭탄을 적재한 배나 항공기, 테러리스트들의 생화학무기 사용 등의 공격 위험”을 엄중히 경고했다. 그러나 당시 부시 행정부는 테러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탈냉전시대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러시아와의 탄도탄요격미사일 협정(ABM) 폐지와 미사일방어(MD)를 주축으로 한 방위정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알 카에다의 비행기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WTC)와 국방부(펜타곤) 건물이 무너지면서 처참한 ‘방어’의 실패를 경험했다. 이제 부시 행정부는 ‘가능성’이나 ‘의혹’의 불씨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불안한 입장이 된 것이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란 등 6개국에 둘러싸여 세계 에너지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중동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다. 이라크는 탄저균 2200갤런, 겨자탄 2000~3000t, 사린 가스 790t 보유를 스스로 인정한 바 있으며, 각종 신경가스와 세균무기 보유 의혹을 받는 생·화학무기 강국이다. 1979년 이래 23년째 종신 대통령을 지내고 있는 사담 후세인은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이란과의 전쟁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국민을 대상으로 독가스를 살포해 5000여명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핵 사찰 수용, 대량살상무기 공개 및 해체, 소수민족 탄압 중지, 테러 지원 금지를 골자로 한 1991년 유엔결의안을 이행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알 카에다 조직의 은신처 제공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이라크는 전략적 중요성, 대량살상무기 보유 능력, 지도자의 행동력이라는 삼위일체에 테러 연계성까지 더해진 상태다.

미국은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연간 50억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이라크의 오일 머니가 무기 개발이나 테러에 연계될 것을 의심하면서 3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하고 있다. 첫째,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와 자금이 중동을 거점으로 하는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 집단에 흘러들어갈 가능성이다.

둘째, 이라크가 탄도미사일로 이란·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 등 인접 국가를 공격했던 것처럼 자국의 생·화학무기와 미사일을 이용해 인접국가와 미국을 직접 공격할 가능성이다. 셋째, 핵탄두를 개발하거나 구매하여 장거리 핵 위협을 행사하고, 이것이 이란·북한 등 ‘악(惡)의 축(軸)’ 국가들의 핵 개발 도미노를 가져올 가능성이다.

과연 대(對)테러전 제2단계에 접어든 미국과 이라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 시점에서 미국을 저지할 열쇠는 이라크가 쥐고 있다. 사담 후세인이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당시처럼 ‘설마 미국이 개입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버틸 것이 아니라, 유엔 사찰을 조건 없이 수용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해체하며 테러 연계 의혹을 불식시킨다면 미국은 ‘가능성’이나 ‘의혹’에 대한 전쟁의 명분을 잃게 된다.

우리가 미국과 이라크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불안해지는 것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이 테러리스트 지원국이자, 악의 축으로 지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근자에 미 행정부 고위관리들은 북한에 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테러 조직과 연계돼 있다는 증거가 감지될 경우 상황은 100%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과 김정일(金正日)을 동일시할 것이다. 북한이 하루속히 IAEA 핵사찰을 수용하고 대량살상무기 개발 및 테러리스트 연계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한반도를 대테러전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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