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호
/논설위원 겸 통한문제연구소장

월남이 공산화된 지 4년이 지난 1979년, 남지나해에는 수천명의 보트피플이 떠돌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조국을 탈출해 나온 그들은 바다에 빠져 죽고 해적들에게 약탈당했다. 그들의 고난은 수년째 계속됐지만 구조의 손길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유럽의 지식인들이 나섰다.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와 레이몽 아롱, 독일의 하인리히 뵐 등 좌우파로 갈려 이념적 대립을 보이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동참했다. 이들은 모금운동을 벌여 5335t의 대형선박을 임대해 남지나해로 보냈다. 터키 선적의 이 배 이름은 「캅 아나무르(터키의 지명)」였다. 이 배가 3년 동안 구조해 유럽으로 데려간 보트피플은 9500여명에 달했다.

그후 ‘캅 아나무르’는 인도적 지원활동을 위한 독일 의사들의 모임이 됐고, 지금은 북한·아프가니스탄·수단 등지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소속으로 북한에서 활동하다 추방된 후 탈북자 인권운동을 벌이고 있는 노르베르트 폴러첸(44)씨는 지난 5월 중국 바깥 공해상에 대형선박을 보내 중국 내의 탈북자들을 구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가 캅 아나무르의 맹렬 활동가인 데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외국공관을 통한 탈북자 ‘기획망명’을 성공시킨 직후라 그 말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엊그제 한 탈북 어선이 서해를 거쳐 한국에 들어 왔다. 북한판 보트피플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인지의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조건을 감안할 때 해상탈북이 대규모로 일어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배를 구하고, 엄중한 해상 경계망을 뚫는 일이 북한 주민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대량 보트피플 사태는 이미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 현장이 서해가 아니라 중국 대륙일 뿐이다. 중국 공안과 북한 요원들로부터 죽음의 추적을 당하면서, 현지인의 착취에 시달리는 수십만 탈북자들의 처지는 20여년 전 남지나해의 월남 보트피플보다 더욱 참혹하다.

탈북행렬이 줄어들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북한당국이 최근 실시한 ‘경제관리 개선조치’는 수백배의 물가 인상을 임금 인상이 충분히 메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당분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초래가 불가피하다. 국가재정은 개선될지 모르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고달파질 수밖에 없다.

일반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돼 온 장마당(암시장)도 폐쇄되고 있다. 북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들어선 이후 가장 ‘혁명적인’ 변화로 간주되는 이번 조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북한은 ‘경제적 무정부 상태’를 맞을 수도 있다. 정권이나 체제의 생존전략과 민중의 생존의지가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 사회가 탈북자 문제가 제기된 지 10년을 넘고 있음에도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실질적 통일의지와 역량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남지나해에서 10년 넘게 떠돌던 보트피플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은 공산 베트남이 개혁을 시도해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베트남의 성공 사례를 재현할 수 있을지는 극히 의문이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기나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동안 중국 대륙과 서해의 탈북자들은 ‘캅 아나무르’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실현에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함께 앞장섰다는 사실을 우리의 지식인들도 한번쯤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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