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準浩
북한이 마치 언제 도발을 했느냐는 듯 얼굴을 바꾸어 미소로 나오고 있다.

며칠 전 금강산에서 열린 장관급회담 실무접촉에 다녀온 우리 측 대표단에 따르면, 북한 대표단은 예전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지고 사뭇 공손한 태도였다고 한다. 또 이번 접촉을 계기로 남북간 대화퍼레이드가 봇물 터지듯 이어질 전망이다. 어제는 장성급회담이 열렸고, 12일부터는 장관급회담이 시작되며, 그 회담이 끝나자마자 8·15 민족통일행사 대표단이란 북쪽 사람들이 서울에 오게 돼 있다.

한 달 뒤엔 상암경기장과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북한 선수들을 구경하게 될 것 같고, 또 한 차례 울음바다를 이룰 이산가족 상봉도 성사 일보 직전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북쪽 사람들과 마주앉아 같이 웃고 울고 떠들고 박수치고 쌀 주고 하면 되는 것인가?

상대가 만나자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화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덮어둘 일이 있고,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우리가 서해에서 꽃다운 장병들을 잃은 건 불과 한 달여 전이다. 북한의 기습 포격에 침몰된 고속정의 인양작업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고, 실종된 한 병사의 시신은 확인조차 못하고 있다. 그리고 도발당사자인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을 유령선이라고 도발 전이나 이후나 같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부 대화지상주의자들은 재도발 방지 역시 종국에는 대화로 해결할 수밖에 없으며, 대화에 임해서도 짚을 건 짚되 합의 가능성이 있는 것부터 성사시켜 대화 분위기를 살려나가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00%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기엔 전제가 있다. 합의가 제대로 이행된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아직 그런 믿음이 축적돼 있지 않다.

남북은 이번 금강산 실무접촉에서 공동보도문이란 것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는 불과 넉 달 전 임동원 대북특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발표했던 4·5 공동보도문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남북 철도 연결, 개성공단 건설, 남북 군사당국자회담 재개 등등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 장관급회담을 하자, 또 한 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하자는 것 등이 핵심인데, 애당초 이행을 전제로 했던 합의라면 넉 달 만에 똑같은 공동보도문을 재탕할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 사이에 피치못할 곡절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북한이 합의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 날 갑자기 서해에서 우리 배를 향해 함포를 쏜 일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북한은 또 다시 똑같은 합의문을 들고 나왔고, 우리 당국자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이번만의 현상이 아니다.

사실 4·5 공동보도문부터가 그 이전의 숱한 합의들을 복원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고, 그 기본골격은 6·15 남북정상회담 석 달 뒤인 2000년 9월 북한 김용순 특사가 서울에 왔을 때 나왔던 공동보도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지난 몇 년간 남북은 수없이 많은 회담과 합의들을 쏟아냈지만 주로 이벤트성 행사들만 이행되고 나머지 진짜 중요한 내용들은 계속 합의문에서만 되풀이 이어져온 셈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합의의 이행에 앞서 회의를 이어가는 것 자체가 중요해졌고, 합의 내용도 앞으로 대화한다, 또 회의한다는 게 핵심이 돼버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북한이 달러와 쌀에만 관심을 두면서 군사적인 긴장 완화 등 근본 문제는 대미(對美)용이란 별도의 용도로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대로라면 이번에도 대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벤트성 행사들로 뒤덮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를 막고 북한을 진정한 협상의 장으로 끌어들이려면 장관급회담의 우선순위를 군사당국간회담 재개쪽으로 바꿔야 한다.
/ 정치부 부장대우 jh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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