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항간에는 “김대중(DJ) 대통령과 이 정권이 북한에 무슨 약점 잡힌 것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들이 돌아다닌다. 그렇지 않고서는 북한에 대해 사사건건 양보하고 기어들어가고 비위 맞추는 DJ의 행태들을 도저히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들은 아니겠지만 일반 사람들의 머리로는 북한문제에 관한 ‘대붕의 뜻’을 헤아릴 수 없기에 해볼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 대통령만큼 ‘대붕’은 아니지만 대북문제를 옆에서 관심있게 관찰해 온 사람들에게조차 이 정권의 대북 저자세, 대북 무체통은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서해교전 사태 때 “얻어터져서 죽는 한이 있어도 북에 총 쏘지 말라”는 식의 DJ 수칙은 북(北)신경 안 건드리기의 절정을 이루더니 엊그제 서해사태에 대한 북측의 ‘희멀건 유감’ 표시에 반갑다는 듯이 ‘명백한 사과로 간주’로 맞장구를 치고 나온 것은 아주 시기적절한 안티클라이맥스답다.

북을 비난하거나 시비 걸 의욕은 없다. 애당초 남쪽에 몽땅 책임을 뒤집어 씌운 것이 북한이었고 그것이 오히려 북한다웠다. 그런 북측이 ‘우발적 충돌’ ‘유감’으로 위장된 ‘공동책임’을 들고 나왔으니 그들로서는 그나마 대단한 양보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남쪽 지도부는 감지덕지한 모양이다. 그러나 북의 속셈은 뻔하다. 월간조선 8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 북한 노동당원은 ‘김대중은 북조선에 쌀과 달러를 가장 많이 준 남조선 지도자’로 고마움을 느낀다며 “우리는 ‘남조선에 김대중이가 있을 때 다 받아내자’는 말들을 한다”고 했다. 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 ‘마지막 타작’을 하자는 것이 이번 북한 ‘유감’의 진짜 속셈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분통 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북한이기보다 우리 쪽과 이 정권에 대해서다. 한 나라의 기본적 존재이유는 자존심이다. 영토도, 안보도, 겨레도 결국 공동체의 자존심을 지키자고 하는 일이다. 자존심을 잃은 나라는 이미 나라도 국가도 아니다. 그런데 걸핏하면 상대방을 건드릴까봐 우리가 먼저 숨죽이고 눈치보고 비위 맞추며 그것을 무슨 대단한 ‘화해의 제스처’인양 내세우는 우리나라 지도층과 일부 지식층의 ‘왼쪽 뺨 내밀기’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역겹기조차 하다.

북이 우리 ‘자존심 접기’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서로 협력하는 자세라면 우리의 유연성은 충분히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럴수록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비굴’ 위에 군림하려는 속셈을 보여온 북한 당국자들에게 더 이상의 자존심 접어주기는 국민 사기(士氣)의 낭비일 뿐이다. 엄청난 범죄자가 단순사기를 친 것을 인정하는 것을 고마워 하면서 재빨리 ‘명백한 사과’로 간주해 주는 이 정권은 이런 수용이 진정 남북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납득할 수가 없다.

여기서 김대중 정권에 한 가지 고언(苦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더 이상 대북액션에 나서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김 정권으로서는 6·15를 이끌어낸 점을 내세워 무슨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을 것이고, 그 점은 십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북문제야말로 국가의 대계(大計)에 속하는 초(超)정권적 사안이며 민족과 나라의 미래에 관한 일이다. 그리고 국가적 자존심에 관한 일이기도 하다.

북한측도 ‘마지막 받아내기’ 이외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고 어차피 다음 정권과 실질문제를 거론할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며 지금 북측이 하는 것들은 퇴임 길에 있는 ‘잘해준 사람’에 대한 인사치레의 성격이 짙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DJ도 이 엄중한 문제를 다음 정권에 넘겨주고 자신은 여기서 손을 뗐으면 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며 더 이상 북한에 이용당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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