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주필

‘DJ 치세(治世)’를 전체적으로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얼치기 시대’라는 말이 가장 맞을 것 같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얼치기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된 것’ ‘이것 저것이 조금씩 섞인 것’으로 풀이되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4년 5개월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투성이였다.

우선 ‘햇볕’도 대포알 한방으로 뒤통수를 맞았고, 안보도 ‘5명 사망 5명 사상’으로 망신살이 뻗쳤다. 집권측은 당초에 ‘튼튼한 안보와 지속적인 햇볕’을 호언장담했다. 양수겸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북쪽의 “돈은 받아챙기되, 대포 쏠 때는 쏜다”라는 ‘한수 위’ 전략으로 인해 ‘DJ 수사학’은 황당하게 돼버리고 말았다.

‘남·북’뿐 아니라 외교안보에서도 ‘얼치기 패턴(pattern)’은 마찬가지였다. 해양세력(미국·일본)과의 전통적 동맹관계도 중시(?)한다면서도, 동시에 대륙세력(중국·러시아)과의 ‘민족주의적’ 악수에도 그들은 꽤 열심인 것처럼 설쳤다. 미국의 배알을 건드리면서까지 그들은 짐짓 중국·러시아 편을 드는 것같이 공언(公言)했다. ABM(탄도탄요격미사일)과 MD(미사일방어체계)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현실은 어떻게 됐나? 부시 행정부는 ‘DJ식 햇볕’에 영 흥미를 잃은 것 같고, 중국은 우리에 대해 마치 무슨 ‘천자(天子)의 나라’나 된 것처럼 눈알을 부라리곤 한다. ‘게도 구럭도 다 잃은’ 꼴이다.

시장경제냐 국가개입이냐, 경제논리냐 정치논리냐, 세계화냐 보호장벽이냐의 논란에서도 ‘얼치기 작태’는 그대로였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바로 그런 허망하게 웃기는 사례였다. 영세상인들을 위한답시고(정치논리·포퓰리즘) 건물임대료 인상을 법으로 제한하기로 했지만, 시행 직전에 건물주들이 값을 왕창 올리는 바람에(시장논리), 결과적으로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되고 말았다. 추곡매입가 정책 역시 세계화의 요청에도 못미치고 농민들의 요청에도 못미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꼴로 머물러 버렸다.

정권의 기둥은 정당성(legitimacy)이 있느냐 없느냐, 효율성(efficiency)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두 물음이다. 김대중 정권은 그 물음에서도 “양쪽 다 잃었다”로 끝났다. 아들들 문제로 정당성도 깻박쳤고, 국가 중추기관들 사이의 ‘치고받기’ 탓으로 효율성마저 종쳤다. ‘민주화 보상심의 위원회’와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과 한총련 간부를 ‘민주화’로 분류하는 바람에 그들을 처벌한 쪽으로서는 “그렇다면 우리는 역적이냐?”며 반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례가 그러했다. 정당성이 없으면 효율성으로 버티든지, 효율성이 약하면 정당성이라도 강하든지 해야 할 터인데, 그들은 이것도 실패했고 저것도 실패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사기(邪氣), 적의(敵意), 증오, 저주… 같은 「부정(否定)적인 에너지」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씐 어둠의 마음 때문이다. 이런 마음에, 개혁 평등 복지 통일 민족주의…에 관한 다분히 포퓰리스트적(的)인 고정관념이 접합하면서 각계각층에 어설프기 짝이없는 얼치기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 시대에는 그래서 밝음, 화창함, 기쁨, 환성(歡 )… 같은 「긍정(肯定)적인 에너지」를 복원시켜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들 마음속에 이미 잠재해 있었지만 한동안 주눅들어 있던,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광화문 광장에서 「대~한민국」 함성으로 폭발한 아름다움과 선의(善意)의 에너지다. 적대, 모해, 꼼수, 해코지 시대와 그 어둠의 상처를 아무릴 수 있는 유일한 힘도 결국은 그런 해맑은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 개혁이라는 것도 오직 환하고 꼬이지 않은 심성에서 나와야만 지난 4년여의 실패작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개혁은 결코 사회과학만은 아니다. 개혁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실천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심성과 됨됨이가 「어둠의 포로」냐 「빛의 성원(成員)」이냐에 따라 독(毒)도 될 수 있고 치유(治癒)도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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