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 좀머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 대(大)기자

서독은 2차 대전 후 소련군을 피해 오거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쫓겨난 1200만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1949년 독일이 분할된 이후에는 동독 공산정권의 질곡에서 빠져나온 400만명의 동독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철의 장막에 마지막까지 남은 틈새로 난민들이 꾸준히 홍수처럼 밀려나오자, 공산주의자들은 1961년에 악명높은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그로부터 28년 후인 1989년, 공산체제에 반발한 난민들의 물결이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의 서독 대사관 앞으로 몰려들면서 공산 통치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예고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안다. 우리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고통을 겪었다. 그러면서 잊을 수 없는 교훈―절박한 상황의 백성들을 더 이상 가둬놓지 못하는 독재체제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도 배웠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지금 탈북 난민 문제를 초미의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탈북자 가운데 남한에 온 숫자는 아직 미미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의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외교공관에 진입해 망명을 기도하는 탈북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중국 당국도 점점 완강해지고 있다. 외국공관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모든 외국 사절들에게 망명을 바라는 탈북자들이 진입하면 즉각 그들을 중국 당국에 넘겨달라고 요청하는 공문까지 보냈다.

최근 몇달 사이에 벌어진 괄목할 사태는 모든 관련국들에 미묘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중국은 지금까지 수만, 수십만명의 탈북자들이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중국 땅에 은신해 있음을 묵인해 왔다. 중국은 이들을 북한 정권의 압제를 피해 나온 ‘정치적 난민’으로 보지 않고, 북한 땅의 기근과 가난을 피해 나온 ‘경제적 유민(流民)’, 즉 무해(無害)한 월경자(越境者)로 보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탈북자 문제로 시끄러워지기를 원치 않는다. 중국 관리들조차 탈북 난민들은 동정할지언정 김정일 정권과의 관계에 위기를 일으키기는 원하지 않는다.

물론 북한의 독재자는 탈북자 문제를 최대한 억눌러 가능한한 빨리 국제적 관심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그는 탈북자들을 차단하기 위해 가혹한 조치도 서슴지 않는다.

한국 정부 또한 난감하다. 중국과의 좋은 관계를 악화시키기를 원하지 않을 뿐더러, 김대중 대통령의 이미 비참하게 찢어진 햇볕정책을 완전히 소생불능 상태로 빠뜨리게 될까 우려하여 김정일을 세게 몰아붙이는 것도 꺼린다.

그렇다면 무엇이 합리적인 자세인가. 독일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지침이 될 수 있다면, 실제 적용할 수 있는 처방은 단 한 가지가 있다. 어떤 경로로 어떻게든 한국으로 오는 탈북자들은 모두 다 받아들이고, 동시에 남북관계를 전반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북한 정권과 대화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탈북자 수를 줄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탈북자 문제를 대처 가능한 정도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평화 공존과 국가연합적 구조, 궁극적인 통일을 향한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나가기 위한 화해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물론 그것은 실천에 옮기고 지속해 나가기가 쉽지 않은 전략이다. 한국은 동포들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한국은 중국에 대해 탈북자들이 ‘자동적이고 공개적으로’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함으로써 외교적 위기를 재촉해서는 안 된다. 또 몽골에 탈북자 난민촌을 짓자는 주장을 지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없다. 난민촌 건립 주장은 지금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다. 미국 국방부의 강경파들은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릴 해방군을 충원·훈련시키기 위해 그런 난민촌을 구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사이 나쁜 두 형제들을 새로운 파멸의 전쟁으로 쉽게 몰고 갈 것이다.

한국인들이 탈북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민족적 의무이다. 결코 비용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또 햇볕정책을 지속하는 것은 상식의 문제다. 대립의 빙하를 녹일 수 있는 것은 따뜻한 햇볕이며, 냉전의 찬바람은 결코 그럴 수 없다.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독일의 선례는 한국의 문제 해결을 오도할 수도 있다. 독일의 경우,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를 불러온 것은 바로 동구(東歐)의 서독대사관 앞으로 몰려든 동독 난민들의 물결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난민들만이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 공산주의는 이미 도처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동독의 호네커에게 “뒤처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호네커 정권의 기반을 잠식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공산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 참여 군중은 날로 늘어나 급기야 수십만, 수백만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북한은 그 같은 혁명 직전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남한의 4700만 국민은 숨을 깊이 들이쉴 여유가 있다. 그들이 북한 겨레와 하나가 되는 것은 아직 꽤 거리가 있는 미래의 일이다. 그렇다면 당면한 통일 비용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 좋은 시기에 통일이 다가오기를 계속 희망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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