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가 진행되는 속도에 비하면 국내 경기 사이클은 정반대 곡선을 긋고 있다. 김대중 정권의 임기가 절반을 넘긴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정권의 사이클과 국내경기의 사이클이 벌써 세 번째 엇비슷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권은 취임 첫해 서울 올림픽을 치르고 상승무드를 타는 것 같았으나, 정책 실패와 노사분규 등이 겹치면서 ‘경제를 다 털어먹고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김영삼 정권도 취임 후 신경제계획이라는 경기 부양책으로 경기를 살리는 듯 하더니, 말년에는 외환위기라는 ‘최악의 부채’를 국민들에게 남긴 채 물러났다.

김대중 정권은 외환위기를 수습해 국제적으로 능력을 평가받고 있으나, 올들어 경기 하강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심화되는 양상이다. 만약 두 전임자들의 ‘정권과 경기 사이클 공식(공식)’에 따른다면 2001년의 국내경기는 더 나빠지고, 임기 말에는 되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질지 모른다.

정권과 경기 사이클이 맞아떨어지는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5년짜리 시한부 정권들은 집권 직후엔 경기대책에 의욕을 보이다가, 그 후 점차 경제에 무관심하거나 정책 실패를 거듭해 말기에는 힘을 잃는 사태로 치닫곤 한다. 노태우·김영삼 정권은 모두 공동정권 형식으로 출발했다가 어느 순간 권력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말기에는 집권세력이 소수로 전락,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채 임기를 마감했다.

이는 위기 때 집권세력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는 얘기다. 이런 ‘악마의 사이클’은 공동정권으로 출발했던 김대중 정권에서도 반복되는 조짐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김대중 정권은 훗날 참담한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고, 제2의 외환위기를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정권에게는 올 가을과 내년 초 사이야말로 경기가 불황에 빠지지 않도록 승부수를 띄울 마지막 기회다.

과거의 사이클을 보면 경기회복 기간은 하강기간보다 줄잡아 2배 걸린다. 나빠질 때는 고속 추락하지만 되살아나는 속도는 느리다. 이는 올 하반기와 내년 초를 놓치면 회생책을 쓰기엔 너무 늦다는 뜻이다.

경기처방도 개혁의 마무리나 구조조정 연내 완료, 벤처지원 같은 판에 박은 듯한 내용이어서는 곤란하다. 정부는 몇몇 부실은행과 부실재벌의 수술이 마치 최후의 처방전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이는 ‘최소공약수’일 뿐 ‘구조조정 플러스 알파(+α)’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외국 전문가들의 시각이다‘플러스 알파’란 모든 분야의 개방을 더 확대하고, 기업활동을 부추기기 위해 행정규제를 더 철폐해야 한다는 얘기다. 특히 성장엔진을 재가동시킬 활력소 산업을 찾는 데 파격적인 발상을 하지 않는 한 임기 말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카드를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미 국제경제연구소(IIE)의 놀랜드(Marcus Noland) 박사는 최근 저서(Avoiding the Apocalypse:The Future of the Two Koreas)에서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경기 회복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남북 화해 과정에서 한국 경제마저 허약해지면 미국·일본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남북대화 속에 이런 호의적인 주장이 나오고 있는 점을 활용, 핫머니 같은 국제 금융계가 한국의 금융위기를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해외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경기를 확실하게 회복시킨 후 임기 말에 개선문을 통과할 것인가, 아니면 전임자들처럼 지옥의 문으로 빨려갈 것인가. 이는 김대중 정권이 몇 달 사이 결론을 내야 할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다.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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