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普植

“우리 어선이 넘어갔기 때문에 북한 경비정이 쳐들어온 거 아니유. 다 이유가 있었던 게지. 일전에 방송도 그렇게 보도하던데.”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50대 운전사가 이렇게 말을 붙였다. 기자는 방심했다. 대응할 찬스를 놓친 뒤였다. 이제 뒤늦게나마 전말기(顚末記)를 적는다.

우리 내부의 분열은 진부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안보 위기 상황은 ‘순간접착제’ 구실을 해왔다. 중산층의 이기심이란 자신이 영위해온 삶의 기반이 외부로부터 어느 선까지 침해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똘똘 뭉친다. 이기심은 체제를 지탱해온 힘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철옹성 같은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이는 바람직하든 않든 하나의 현실로 나타났다. 북한 경비정의 서해 도발이 있은 지 사흘 뒤. 숨진 병사들의 영결식이 있었다. 그때 이미 문화방송(MBC)·한겨레신문 등 일부 언론매체는 우리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서해 교전 당시 우리가 당한 데는 우리 어선들의 불법 월선(越線)도 한 원인이라는….”

지난날 관점에서라면 ‘적전분열(敵前分裂)’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면 일시적 분열에 꼭 흥분할 이유는 없다.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취재의 기본이고 흐름에 거역하려는 용기는 가끔 아름답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서도 뭔가 석연치 않고 피아(彼我)의 구별이 안 된다. 우리 어선의 월선을 먼저 문제삼은 쪽은 도발 당사자인 북한의 평양방송이나 조선중앙방송이 아니었다. 발동을 건 쪽은 우리 언론들이었다.

우리 어선들이 월선한 것과 우리 고속정이 조준사격에 의해 격침된 것 사이에 어떤 등식이 성립되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국방부에서 “우리 어선이 ‘북방한계선’은커녕 ‘어로저지선’도 넘은 적이 없다”고 거듭 확인을 해줬음에도, 여기에 집착하고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5일 밤 태풍 ‘라마순’이 불어올 때다. 바로 그 시점 본사에 있는 전화들이 많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한 독자가 대뜸 “MBC를 봤는가?”라고 물었다. 당시 MBC는 미디어를 비평하는 정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독자들로 하여금 전화를 걸게 만든 것은 태풍에도 불구하고 정규방송을 내보냈다는 편성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의 내용이었다.

이 프로는 북한 경비정의 서해 도발 보도에 대해 비평하면서, “일부 언론이 사실 확인 없이 냉전적 자세로 남북대결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이란 주로 조선일보다. ‘사실’이란 앞서 말했던 MBC의 보도 내용이다. 우리 어선이 어로저지선을 넘은 사실을 무시한 채 조선일보 등이 대북 강경 자세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시작한 프로는 “그래서 안티조선 운동이 다시 불붙고 있다”는 식으로 옮아갔다. 정년퇴임하는 연세대 S교수를 욕한 대학생들의 입장을 소개하고 ‘노사모’ 소속 한 연예인의 발언 장면 등을 보여줬다.

이들 언론은 설마 현 정권의 편에 서서 햇볕정책을 무리하게 지키기 위해 그렇게 했을까. 국제사회에서 외면받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변호하는 게 '정의(正義)’라고 이들이 결코 착각할 리는 없다고 본다.

여하튼 이번 사태로 우리 사회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꽃다운 젊은이들의 인명 손실도 참기 어려운 노릇인데, 더욱 울적하다.
/사회부 차장대우 congchi@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