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은 문재인 정부때 이뤄진 국내정보관 제도와 대공수사권 폐지에 대해 “이스라엘이 신베트를, 영국이 MI5를 폐지한것과 같다”고 했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 /조선일보 DB
이병호 전 국정원장. /조선일보 DB

이 전 원장은 최근 출간한 회고록 ‘좌파정권은 왜 국정원을 무력화 시켰을까’에서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기능이 폐지된데 대해 “국정원을 반쪽짜리로 만든 것”이라며 “세계 어느 국가도 자국의 국내정보 기능을 스스로 망가뜨린 사례가 없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국내정보관 역할에 대해 “사회 각계각층과 연락 체계를 유지하면서 우리 사회 내 취약요소들을 모니터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시스템”이라며 “CCTV가 범죄 예방 기능을 수행한다면 국내정보관은 사회를 보호하고 안녕을 지키는 공안 기능을 위한 CCTV 역할을 담당한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부실한 대회 운영으로 문제가 됐던 새만금 잼버리 대회를 예로 들면서 “대규모 국제 행사이므로 국정원은 당연히 국가안보 차원의 시각에서 준비 상황을 관찰한다”며 “북한의 방해 책동 가능성과 테러 위험이 없는지 비상상황 발새시 연락 체계 등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국내정보관은 잼버리 대회 준비 상황의 미흡한 점을 제3자적 시각에서 발견할 수 있다”며 “미흡한 점이 대회 전체를 망가뜨리는 큰 문제로 발전할 소지가 있을 때 관찰 소견을 대통령실에 직보할 수 있다”며 “국내정보관 기능이 제대로 살아 있었다면 세계 잼버리 대회의 실패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국내정보관 제도 폐지로 “국정원의 대내 보안정보 역량이 결정적으로 훼손됐고 효율적 국정운영을 위한 주요 수단을 잃게 됐다”며 “국정원의 국내정보관 제도와 대공 수사권 폐지는 마치 이스라일에 신베트를, 영국이 MI5를 폐지한것과 같다”고 했다. 명목상 방첩, 테러, 국제범죄, 마약 범죄 등의 사안이 국정원의 직무로 남아 있으나 허울뿐이라는 것이다.

이 전 원장은 “미국 FBI는 댐, 상수도, 전기 시설과 같은 국가안보 취약 시설 리스트를 유지하고 이들 시설과 관련된 위험 요소들을 지속적으로 살핀다”며 “미국 FBI도 수행하는 국가적 기능을 문재인 정부는 대책 없이 사실상 없앴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보이지 않는 위협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책무는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 국가 정보기관의 몫”이라며 “모든 나라가 국가 공안 기능, 내부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기능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현행 국정원법상 국정원의 비밀공작 수행 규정 자체가 누락된데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국정원 직무 관련 법 규정에 정보기관의 기본 임무인 비밀공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반영해 선진국형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 원장은 “법 규정의 뒷받침이 없어도 국정원은 사실상 비밀공작 활동 범주에 해당하는 활동을 한다”며 “국정원은 북한과 비밀 교섭 활동도 하고 우리 역사상 이뤄진 남북관계의 모든 비밀 접촉은 대부분 국정원 작품”이라고 했다. 모두 비밀공작 범주에 속하는 일이지만 법 규정엔 빠져 있다는 얘기다. 이 전 원장은 “선진국들은 정보기관 직무를 법으로 세세히 정해놓고 있지 않다”며 “선진국들은 정보기관 역할을 국가안보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 필요시 동원돼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안보 수단이라고 상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문재인 정부때 이뤄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ㆍ국내정보관 제도 폐지 및 적폐청산 수사로 국정원은 야성을 잃고 “그저 그런 행정 관료 조직이 됐다”며 “세상에서 가장 정보기관답지 않은 정보기관 모습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장을 대통령이 신뢰하는 인사로 보임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며 “그러나 나머지 간부들은 국정원 출신으로만 구성하는 것이 맞는 상식”이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외부 인사의 국정원 주요 보직 임명을 “축구장에 야구 선수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의 정보수집ㆍ분석 역량 강화를 위해 순환 보직 인사 시스템 개선 및 계급 정년 문제 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순환 보직을 한다며 국내 요원을 해외에, 해외 요원을 국내 분야에 보직하는 경우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 원장은 “훌륭한 정보 베테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이런 불안정한 인사 방식으로는 국정원이 결코 좋은 정보기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직급별로 복무연한을 둔 계급정년 제도에 대해서도 “국정원 정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신입 직원수와 퇴직 직원 수의 불균형으로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에 퇴직하는 직원이 많이 생기고 있는건 문제”라며 “한창 일할 나이의 직원들이 국정원을 떠나는건 국정원의 정보 경쟁력 약화를 의미하고 직원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을 최고 정보기관으로 만드는 일은 오직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며 “대통령의 관심이 없으면 국정원은 그저 허접한 정보기관에 머물게 된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국정원을 최고의 정보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특단의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영국주재 북한 공사로 근무하다 2016년 탈북한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에 대해 “황장엽 탈북 이후 가장 성공적 탈북 사례”라며 “국정원이 앞으로도 (북한) 엘리트의 탈북 유도 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북한에서 온 엘리트보다 북한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며 “(엘리트 탈북민들은) 우리의 국가안보에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국가정보 자산들”이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태 공사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경우와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며 “사연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 관련 기관과의 치밀한 교섭 끝에 한국행이 결정됐다”며 “태 공사는 북한 외교 정책과 외교행태 및 관계 인물에 대한 정보의 보고였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태영호 의원이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나온 뒤에 쓴 회고록 ‘3층 서기실의 암호’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데 대해 “실로 놀라운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이라며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이뤄낸 놀라운 성취”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태 의원의 개인적 성취만이 아니다”며 “분명 김정은에게 큰 충격을 준 전략적 의미의 성취”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태 의원의 성공)은 절망에 빠진 북한 엘리트 지배층에 희망을 주는 사례로 작용할 것”이라며 “태 공사의 탈북은 다른 많은 엘리트의 탈북과 함께 이처럼 자유 민주적 남북통일 여건 조성에 기여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장 재직 중 태 공사 이외에도 엘리트 탈북민 여러 명을 한국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이들을 비밀리에 한국으로 데려오는 과정이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며 “잘못될 경우 외교적 마찰과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그간 국정원은 이런 위험한 탈북민 이송건을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고 했다. 이어 “북한 정보 당국은 남한행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탈북자가 주요 인사일수록 보통 행방불명으로 처리하곤 한다”며 “이처럼 엘리트 탈북민은 중요한 휴민트 출처이고 국정원은 앞으로도 엘리트의 탈북 유도를 위한 공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육사 출신으로 베트남전 참전 이후 돌아와 1970년 국정원에 입사해 해외담당 차장 등을 지낸 뒤 퇴임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2015~2017년 국정원장을 지냈다. 2018년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박근혜 대통령에 전달한 혐의로 징역 3년6개월 실형 선고를 받고 2년 넘게 수감생활을 한 뒤 2022년 연말에 사면ㆍ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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