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2023년 3월 27일 핵무기병기화사업을 지도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8일 보도했다. 신문은 '화산-31'로 명명된 것으로 보이는 새 핵탄두 추정 물체가 대량생산된 모습도 전격 공개했다./노동신문 뉴스1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2023년 3월 27일 핵무기병기화사업을 지도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8일 보도했다. 신문은 '화산-31'로 명명된 것으로 보이는 새 핵탄두 추정 물체가 대량생산된 모습도 전격 공개했다./노동신문 뉴스1

지난주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대양주 담당 선임보좌관과 정박 국무부 대북 고위 관리가 연이어 언급한 대북 핵 협상에서의 ‘중간 조치’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다. 실현 전망이 요원한 궁극적 비핵화 실현에 앞서 한반도 정세 안정을 위한 ‘중간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이는 미국 정부, 특히 민주당 정부가 1990년대 이래 대북 핵 협상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종종 제기하곤 했던 ‘단계적 비핵화’ 논리의 부활을 의미할 수도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핵 협상 대표가 수년 내지 수십 년간 변하지 않는 북한과는 달리, 4년의 짧은 정권 임기와 그보다 더 짧은 자신의 보직 임기 중에 가시적 성과를 내느라 시간에 쫓겨야 하는 미국의 협상자들에게 있어, ‘중간 조치’를 통한 단계 접 접근법은 흔히 빠지기 쉬운 달콤한 유혹이자 함정이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이에 관한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실패한 과거 정책으로의 회귀이며, 김정은에게 시간만 벌어줄 것”이라 비판했고, 1994년 미·북한 제네바 핵합의 당시 협상 대표였던 개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파괴무기 조정관도 “중간 조치는 미국의 오랜 북핵 협상 정책이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의 말처럼, 미국 정부가 과거 대북 핵 협상에서 실제로 시도했던 ‘중간 조치’들은 모두 실패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보상을 통해 북한의 핵 활동을 일단 동결시키고 최종적 비핵화를 약 10년 후로 미루었던 미·북한 제네바 핵합의는 북한에 비밀 핵 프로그램을 완성할 시간과 자금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2005년 6자 회담에서 합의된 ‘9·19 핵합의’ 역시 북한의 비핵화와는 거리가 멀었고, 무의미한 일부 북한 핵 시설 불능화의 대가로 미국의 양대 대북 제재 조치인 테러 지원국 제재와 대적성국교역법상의 제재를 해제함으로써 북한 외교에 큰 승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한 과거의 ‘중간 조치’는 북한의 핵무장을 다소 지연시킨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북한이 이미 50~1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현 상황은 그 당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시점에서 미국과 북한이 합의할 만한 ‘중간 조치’는 한 가지뿐이다. 북한의 핵활동 동결 또는 부분적 핵능력 감축에 대한 대가로 유엔 제재 조치의 일부를 해제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건, 그러한 방식의 협상은 결국 북한의 핵무장을 사실상 용인하는 ‘핵군축 협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이 2017년 ‘핵무력 완성’ 선언 이래 줄곧 추구해 온 협상 목표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을 용인하는 군축 회담”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최근 김영호 통일부장관의 입장은 한국 정부의 그러한 우려를 반영한다.

대북 핵협상의 두 가지 방법론인 ‘일괄적 비핵화’와 ‘단계적 비핵화’가 갖는 장단점은 명확하다. 일괄적 비핵화는 북한의 즉각적 전면 비핵화와 그에 대한 반대급부 제공을 동시에 교환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나, 북한의 완강한 비핵화 거부로 조기 합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반면에 단계적 비핵화는 합의가 비교적 쉬울 수 있으나,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부분적 핵감축의 대가로 유엔 제재가 견딜 만한 수준으로 완화되면 즉각 합의 이행을 중단하고 협상장을 영원히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단계적 비핵화 합의를 통해 북한 핵시설과 핵탄두가 절반으로 감축된들, 10분의 1로 감축된들, 북한의 대남 핵위협에는 별 차이가 없다.

북한의 핵보유와 비핵화 사이에 유의미한 중간 단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계적 비핵화를 통해 북한을 점진적으로 비핵화하자는 논리는 북한과 그 동조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이며, 비핵화 없이 제재 해제를 달성하려는 그럴싸한 시나리오일 뿐이다. 북한이 대미 협상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단 하나, 유엔 제재의 해제를 통해 영원한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다. 유엔 제재는 북한의 이 같은 전략 목표를 가로막고 있는 유일한 걸림돌이며, 북핵의 영구화를 막기 위한 마지막 희망의 끈이다. 현행 유엔 제재는 일단 해제되면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다시는 복원될 수 없다. 따라서 부분적 제재 해제를 전제로 하는 ‘중간 조치’는 북한의 핵무장을 영구화하는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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