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작년 12월 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이 작년 12월 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이 지난해 12월 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와 통일 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선언했다. 대한민국의 정식 국호를 사용하면서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지난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기구의 폐지를 결정하고 북한의 영토 범위를 헌법에 명기하기 위한 개헌 의지도 밝혔다. 이는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전면 부정하고 두 개의 주권국가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의미다.

북한이 3대에 걸쳐 일관되게 견지해온 ‘하나의 조선’ 원칙에 입각한 통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남북 간 체제 경쟁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과 흡수통일에 대한 실존적 공포심에 있다. 남북이 서로 주권국가로 인정하면 통일의 명분이 없어지고 수단과 방법도 대폭 제약되므로 흡수통일을 막을 정치적 방패가 될 수 있다. 김정은 연설의 행간에는 ‘우리는 이제 적화통일이든 평화통일이든 다 포기할 테니 당신들도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을 포기하라’는 속내가 읽힌다.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에 의한 통일을 당연시하고, 핵무장한 북한에 대한 억지와 방어 차원에서 한미 연합 훈련을 강화하고, 심지어 참수 작전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만, 김정은에게는 정권 종식을 겨냥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자유분방한 한국의 대중문화도 체제를 위협하는 악성 ‘바이러스’로 인식되고 있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까지 제정하여 한류의 유입을 중형으로 다스려야 하는 정권에는 어떤 통일이든 한류 ’바이러스’의 수문을 여는 것이고, 그 홍수가 종국에는 김정은 체제를 삼킬 악마로 보일 것이다.

김정은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 운운한 부분만 보면 평화통일 대신 무력 적화통일을 추구하려는 의도로 착각하기 쉬우나 이는 한미 양국의 “북침 도발 책동”으로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적화통일을 위한 핵 선제 사용이나 남침은 북한 체제의 종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김정은이 모를 리 없다. 적화통일이 아무리 중해도 정권의 존속보다 우선할 수는 없고 생존을 희생하면서 추구할 만한 가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주눅 들고 불안할수록 허세를 부리고 언행이 거칠어지는 경향이 있고 말로는 못할 짓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선제 핵 공격으로 장렬한 집단자살을 시도하기 보다는 변신을 통한 생존에 희망을 거는 것 같다.

적화통일이나 북한이 원하는 방식의 평화통일이 불가능하고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에 흡수 통일될 ‘위험성’만 더 높아진다면 통일을 아예 포기하고 2국 체제로 가는 것이 북한에게는 실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통일의 결정적 기회가 오더라도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는 재앙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 관계를 국가 관계가 아니라고 못 박은 것은 남북이 상대방을 무제한의 자치권을 보유한 지방정부로 간주한다는 의미다. 이는 북한이 자치 능력을 상실할 경우 대한민국이 중앙정부의 자격으로 자치권을 회수하고 직할 통치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특히, 1991년 9월 유엔 동시 가입으로 남북이 국제적으로는 별개의 주권국가로 공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에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 중요하다. 이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북한 안정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할 때 제3국의 시비를 차단하고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면 국제법상 유엔 안보리의 승인 없이는 자위권의 범위를 벗어난 군사 개입이 불가능해지고, 대량학살 중단과 인도적 참사 수습을 위해 우리가 개입하려고 해도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에 막혀 손발이 묶일 수 있다.

북한이 우리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겠다면 이를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고,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헌법 3조의 영토 조항을 개정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당장 통일의 가망이 보이지 않고 통일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식어가고 있다고 통일의 기회가 기적처럼 찾아올 때 이를 놓칠 결정을 졸속으로 하면 안 된다. 2500만 동족에게 폭압 체제에서 해방되어 인간다운 삶을 누릴 희망을 박탈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될 것이다. 좌우 양 진영에서 차제에 통일을 포기하고 2국 체제로 가자는 주장이 분출하더라도 정부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서독이 동독의 집요한 국가 승인과 2국 체제 전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 이유 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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