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브루킹스연구소와 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 조선일보가 11일 공동 주최한 비공개 외교 안보 관련 토론회에서 한국과 미국의 전문가들은 “협상으로 비핵화를 달성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북한 체제가 붕괴해야 핵 위협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한국 측은 한국 자체 핵무장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미국 측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약속은 굳건하다”고 했다.

10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서울호텔에서 열린 제12회 브루킹스연구소-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조선일보 국제 콘퍼런스에서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 선임연구원이 발표하고 있다./김지호 기자
10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서울호텔에서 열린 제12회 브루킹스연구소-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조선일보 국제 콘퍼런스에서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 선임연구원이 발표하고 있다./김지호 기자

이날 서울 시내 한 호텔에 진행된 채텀하우스 토론회에서는 한·미·일 및 북·중·러 연대 가속화에 대한 한·미 전문가들의 허심탄회한 의견이 오갔다. 다수 참석자는 현실론에 입각해 한·미·일 협력을 강화해 북·중·러의 세력변경 시도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텀하우스 룰’은 자유로운 토론을 위해 발언자를 비밀에 부치는 채텀하우스(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의 별칭)의 토론 규칙이다. 이날 토론은 한국 전·현직 장관·외교관·학자들과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헤리티지재단, 신미국안보센터 소속 한반도 전문가 30여명이 참여해 김숙 전 주유엔대사 사회로 약 3시간 20분 동안 진행됐다.

◇협상 통한 비핵화? “수십년 협상했는데, 北核 300기”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북한과 테이블에 앉아 협상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를 해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 측 인사는 “협상을 통한 비핵화 논의를 수십년 이어왔는데 지금은 2024년이다. 북한은 이제 결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명백히(crystal clear) 밝히고 있다. 북한은 대화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러시아가 핵개발을 돕든 그렇지 않든 핵전력을 완성시킬것이다.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게 현실이다”라고 했다. 다른 미국 측 참가자도 “북한 체제가 붕괴하기 전엔 비핵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측 참가자도 “북한 체제가 거대한 나무라면 핵은 나무에 딸린 가지라고 생각하며 가지치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며 “핵이 북한 체제와 일맥상통하는 일체, 나무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다른 한국 측 참가자는 “북한이 곧 핵무기 300기를 확보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는데 우리 후손들은 ‘북한이 20~30개 가졌을 때 뭘했길래 훨씬 더 심각한 북핵 그림자 속에 살게 됐느냐’고 할 것 같다”고 했다.

미국을 통한 확장 억제가 효율적인 북핵 억제 수단이라고 전문가는 말했다. “북한 도발에 압도적으로 대응해 한미일 전력을 북한이 넘볼 수 없다는 인식을 명확히 심어줘야 한다” “확장 억제의 유용성은 무한대에 가깝다. 북핵 사용의지를 꺾을 수 있고, 핵 사용시 대응할 수 있다” “확장억제야 말로 한국 안보의 근본(bedrock)” 같은 발언이 이어졌다.

한·미 전문가들은 이날 미국 대선이 치러지기 전인 2024년에 북한이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고, 바이든 2기 정부가 들어설 경우에도 북한은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다. 한 참가자는 “트럼프 당선시에만 협상에 나설텐데 트럼프가 어떤 선택을 할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다른 인사도 “트럼프 재집권시 미북 대화가 재개되더라도 한국이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 정부는 지금부터 한반도 문제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남북한의 ‘평화공존’은 수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참가자는 “이는 비평화공존이지 평화공존이 아니다”라며 “섣불리 평화공존론을 꺼내는 것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한반도 힘의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대한민국 주도 흡수통일이 북핵 해법이라는 의견도 내놨다. 한 참석자는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북한 주도로 통일하겠다는 것인데, 북핵문제 해법으로 한국 주도 통일을 대안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른 참석자도 “북한이 한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흡수통일을 꺼린다고 우리가 흡수통일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며 “공개적으로 흡수통일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흡수통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회피하는 태도를 벗어나 자신감을 갖고 통일전략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했다. 미국 측 관계자도 “북한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통일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지난 캠프데이비드 선언에서 미국과 일본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한국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 고무적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확장억제에 따른 핵 보복? “미국 대통령 성향에 달려”

현실적으로 미국을 통한 핵 확장 억제가 대안이라는 인식은 공유됐지만, 의구심도 제기됐다. 미국이 실제로 한국이 핵공격을 당했을 때 핵무기로 보복하겠냐는 것이다. 미국 측 인사는 “한국의 우려대로 미국이 핵으로 보복 공격을 할지는 사실 그 시점 미국 대통령이 누군지, 한국이 어떤 공격을 당한 상황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측에서는 재차 자체 핵무장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 참가자는 “한미원자력협정을 폐기하고 한국이 군사적으로 원자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미국이 열어줘야 한다”며 “한국 자체 능력으로 핵추진 잠수함을 개발하도록 해주고, 핵연료의 재처리 제한을 완화시켜 유사시 한국이 핵무기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고 했다. 당장 한국이 핵무기 개발은 하지 않더라도 한미동맹 성격이 변화할 경우에 대비해 핵 개발을 위한 잠재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 핵 위협이 소멸되면 한국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한다는 조건을 다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 나왔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이를 기회로 주한미군 감축과 자체 핵무장 능력 강화를 맞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미국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각)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타운홀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각)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열린 타운홀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한국의 자체적인 핵무장은 불가능할 뿐더러 실효성도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 미국측 인사는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가지게 될 핵무기 300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한반도에서 북한의 오판과 착오로 인한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북한 핵 프로그램 동결과 단계적 접근을 포함한 ‘위험 감소(risk reduction)’ 조치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으로 접근하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한미 양측은 그동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주장하며 선 동결 후 보상과 같은 단계적 조치에 반대해왔는데 역내 긴장 완화를 위해서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 대선 전 NCG 협상 등 한미 협력 강화해야

한 참석자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리 한·미·일 3국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3국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NATO 수준은 안 되더라도 현실적으로 3국 협력을 통해 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한미 양국이 핵협의그룹(NCG) 논의에서 속도를 내야한다는 당부도 이어졌다. 미국 대선 이전에 지난해 ‘워싱턴 선언’과 ‘캠프 데이비드 선언’을 강화하는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과의 군사협력에 대해서는 신중론도 나왔다. 일부 참가자는 ‘한국군이 일본과 육상전 훈련도 함께 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는데 다른 참가자는 “섣부르게 일본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다가는 한국 진보진영의 반발로 한미일 협력체계 자체가 약해지는 역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과거사 문제 등으로 첨예한 대립이 있는 만큼 국민 여론을 살피며 공조를 강화해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국내정치적인 이유로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줄여나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한 참석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면 부정적 파급효과가 전세계에 확산할 것”이라며 “유럽에서 도전세력인 러시아,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세력 확장에 나설 것이고 북한은 더 대담한 도발에 나서며 대단히 심각한 안보위협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했다.

이날 회의에는 로버트 아인혼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앤드루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수미 테리 전 윌슨센터 국장, 김두연 신미국안보센터 선임연구위원, 한민구 KRINS 원장, 권영해·이상희·이종섭 전 국방부장관, 유명환·윤영관 전 외교부장관, 홍용표 전 통일부장관, 김천식 통일연구원장,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 박철희 국립외교원장,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 우정엽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 김수광 국방부 방위정책관 등 한미 전문가 30여 명이 참석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