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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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각하’라고 호칭하며 최근 발생한 강진 피해를 위로하는 전문을 보냈다. 북한이 평소 ‘철천지 원수’라고 하는 일본 총리에게 ‘각하’라고 극존칭을 사용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김정은이 전날 ‘일본국 총리대신 기시다 후미오 각하’에게 전문을 보내 “새해 정초부터 지진으로 인한 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적 손실을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에게 심심한 동정과 위문을 표한다”며 “나는 피해 지역 인민들이 하루빨리 안정된 생활을 회복하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북한이 김정은 명의로 기시다 총리에게 이례적으로 ‘각하’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위문 전문을 보낸 건 북·일 관계 개선을 노린 시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이 강화하면서 빈틈이 보이지 않는 한국과 미국 대신 일본을 활용해 외교적 고립을 피해 보려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 당국자는 “한국과는 다르게 일본을 대함으로써 우리 사회 내부 갈등을 유발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족인 한국에 대해서는 초강경 자세를 보여 남남갈등을 유발하고 일본에는 유화적 태도를 보여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프로세스를 희석시켜 보려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일본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며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포함해 북한 최고 지도자가 일본 총리 앞으로 지진 등과 관련해 위문 메시지를 보낸 것은 최근에 예가 없었다”고 했다. 하야시 장관은 김정은 전보에 대한 회신 여부에 대해선 “각국 정상 등의 메시지에 대한 회신은 현시점에서는 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북한은 과거에도 ‘노림수’가 있을 때 ‘각하’ 호칭을 활용한 사례가 있다.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대해 2017년까지만 해도 ‘늙다리 미치광이’라고 했다가, 미·북 정상회담으로 대북제재 해제를 모색할 때는 깍듯이 ‘각하’ 표현을 썼다. 김정은은 2018년 트럼프에 보낸 친서에서 9번에 걸쳐 ‘각하’(Your Excellency)로 칭하며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타고난 각하를 직접 만나고 싶다” “각하와 직접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9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공항에 도착해 인민군 의장대 사열을 할 때 북한군 대장은 “대통령 각하, 조선인민군 의장대는 각하를 영접하기 위하여 정렬하였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후 ‘하노이 노딜’ 등으로 북한의 제재 무력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뒤에 북한은 문 전 대통령에 대해 “겁먹은 개” “보기 드물게 뻔뻔한 사람” “특등 머저리” 등의 악담을 쏟아냈다.

김정은의 아버지인 김정일도 미국 대통령에게 ‘각하’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에너지 지원 등을 받아내기 위한 6자회담이 진행되던 2005년 김정일은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 대해 “부시 대통령을 각하라고 할까요. 부시 각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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