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仁培
/ 문화부차장 jane@chosun.com

“내일 아침 금강산 관광선이 떠난다고 하는데 말이 되느냐. 북한이 우리에게 총을 쏘고 장병이 죽어가는데 무슨 북한 관광이냐.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서해 교전에도 불구하고 내일 일본에 축구구경 간다는 게 사실이냐.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전화한다.”

북한의 서해도발이 발생한 지난 29일과 이튿날인 30일, 신문사에는 격분한 독자들의 항의전화와 이메일이 종일 빗발쳤다. 온 국민이 월드컵 성공의 흥분과 감격에 들떠있는 상황에서 빚어진 사태이기에 충격이 더 큰 듯했다. “북한에 쌀 퍼주고 무기 사도록 돈 대준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며 현정부의 햇볕정책을 정면에서 비난하는 독자들도 많았다. 아무리 햇볕정책도 좋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북한의 서해도발은 마침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4위전을 응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울 곳곳의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던 29일 오전에 발생했다. 바로 그 시각, 서울에서 불과 몇 십㎞ 떨어진 서해상에서는 같은 또래의 청년들이 북한 경비정의 기습 사격에 피흘리며 쓰러졌다. 바다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 군인들과 거리에서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환희에 차있던 청년들은 서로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한편에서는 축제를 벌이고, 한편에서는 죽어갔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대비인가.

이날 거리의 대형전광판에서는 서해교전의 상황이 월드컵보도 중간중간 TV 스폿뉴스로 전해졌다. 숨진 군인들의 유가족들이 어처구니 없는 자식의 죽음에 울부짖고 있는 그 시각, 서울의 거리에서는 축포가 올라가고 불꽃놀이가 밤 하늘을 수 놓았다. 그러나 그 불꽃은 힘이 없었고, 태극기를 흔들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어깨는 처져 있었다. 불안과 우려의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졌다.

29일 신문사에 전화를 건 한 중년 여성은 “햇볕정책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우리 군이 선제공격을 못한다는 것이 정말이냐”며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 중년남자는 “북한 고물 군함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수십명이 죽거나 다쳤다. 우리가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이 지경이 됐느냐”고 울분을 토해냈다.

“TV를 보니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대통령이 참석해 서해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묵념을 하는데, 검은 넥타이가 아닌 빨간 넥타이를 맸더라”라며 “이럴 수 있느냐”는 항의전화도 있었다. 정부 당국이나 정치 지도자들, 일부 방송매체 등의 안보 불감증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고 이들은 우려했다.

작가 복거일씨는 “정치 지도자들이 군 지휘관들을 정치인으로 만든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 군 지휘관들은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군사상황을 바라보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는 몇 달 전 우리 해경이 영해를 침범한 중국어선을 단속하러 올라갔다가 오히려 중국 어부들에게 당하고 쫓겨난 웃지 못할 사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진보세력들은 “서해교전은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며 “이 사건을 빌미로 보수세력들이 다시 남북대립과 냉전의 논리로 돌아가려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전쟁은 우발적인 사건으로부터 확대됐고 우리 군에 선제포격을 가하는 것이 바로 냉전사고의 결정체다. 북한이 한 것은 우발이고 우리가 하는 것은 ‘냉전’인가. 우리는 월드컵 축제로 상승하는 국운과 민족적 자긍심을 짓밟으려 한 북한의 의도와 속셈을 이번 기회에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오 필승, 코리아’ ‘오 피스, 코리아’는 소리높여 외치기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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