池萬元

어제 서해해전에서 발생한 우리의 피해 상황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속절없이 당할 수 있을까 한심하고 걱정된다. 북한 함정은 구식이고 우리 함정은 신형이라 총끝이 목표물에 조준되면 배가 흔들려도 명중이 된다. 이러한 “자이로 조준시스템”은 2001년 12월, 북한 괴선박을 몇 초 이내에 침몰시킨 일본 순시선에도 있었고, 우리 함정에도 장착돼 있다. 남북한 함정이 총을 쏘고 싸우면 북한 함정은 우리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일방적으로 당했을까?

2001년 6월 2일부터 2주간 1만4000t급, 7000t급 등의 북한 선박이 제주해협과 NLL을 침범했다. 그때부터 우리 해군은 북한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됐던 ‘유엔사 자동교전 규칙’에 따른 교전 권한을 대통령이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신중하게 대처하라”, “일단 청와대에 보고하라”는 뜻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저들이 포를 쏘는 동안 우리 함정은 청와대를 쳐다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도발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으로 본다. 저들은 며칠전 27일에도 1척, 6월 28일에도 2척의 함정을 보내 NLL을 침범하면서 우리의 무력한 대응상태를 파악했다. 그런 다음 29일 드디어 작정하고 선제공격을 가했다. 우리 해군은 이번에도 NLL을 일시 침범했다가 올라가겠거니 하고 방심했을 것이다.

북한은 1999년 6월 연평도 해전에서 완전 참패하고도 한동안 자존심을 묻어왔다. 어제의 도발행위는 이에 대한 일대 설욕전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단지 설욕이 목표였을까? 이번 침범 사건은 그동안 미국은 물론 많은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온 햇볕정책에 일대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앞으로의 남북한 관계는 냉전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북한이 더 잘 안다. 냉전상태로 돌아서면 지원도 없어진다. 앞으로도 얻어갈 현금과 물자의 양이 엄청난데, 그렇다면 저들은 어째서 그 모두를 포기하고 도발을 했을까?

이번 도발이 이 엄청난 지원을 상쇄할 수 있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미국과 북한은 마치 단선로에서 마주보고 달리는 두 개의 기차처럼 곧 부딪치게 돼 있다. 9·11 테러에 대량살상무기가 장착됐다면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테러도 무서운 것이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테러에 사용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다.

그 무기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바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인 북한이다. 따라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북한을 때려야 할 악이라고 규정했다.

왜 도발했을까

악성무기를 내놓지 않는다 해서 북한을 때리면 미국은 수많은 약소국들로부터 강대국의 횡포라며 비난을 받을 것이다. 북한의 무기를 빼앗으려면 다른 명분이 필요하다. 미국 상원은 ‘북한인권위원회’를 6개월 전에 설치하여 북한의 ‘주민 탄압 사례’를 모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북한으로부터 탈출하는 난민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 따라 상원과 하원에 이어 국무부도 탈북자에게 난민 대우를 해주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북한과 중국 국경에 대규모 난민 수용소 설치도 서두르고 있다.

얼른 보면 이는 인권문제로만 보이지만 바로 여기에 김정일이 무서워하는 함정이 있다. 김정일이 밀로셰비치 이상의 악마로 세계인들에게 비쳐지게 하는 작전인 것이다. 밀로셰비치는 ‘인종청소’라는 인권문제 때문에 다국적군의 몰매를 맞았다. 김정일이 세계인들에게 밀로셰비치 이상의 악마로 비쳐지는 순간부터 미국은 북한 정권을 제거할 수 있는 명분을 갖는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남북한 수뇌들이다.

이번 도발은 이렇듯 위기가 코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북한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첫 번째의 대응책이다. “남한 국민은 지난번 연평해전을 통해 북한군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아니다. 전쟁이 나면 북한은 매우 무섭다. 전쟁을 막으려면 미국에 반대하라”는 위력적인 메시지를 보내려고 도발한 것이다. /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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