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光仁
/통한문제연구소 기자·정치학 박사 kki@chosun.com

엊그제까지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서는 김정일의 ‘당사업 시작’ 38주년(6월 19일) 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김정일의 ‘당사업 시작’이란 그가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활동을 시작한 것을 말한다.

북한이 이날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였다. 북한은 그동안 대외적으로 공식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날을 ‘6월의 명절’로 기념해 왔다. 김일성 생일(4.15)이 ‘4월의 명절’, 김정일 생일(2.16)이 ‘2월의 명절’로 불리는 것과 같다.

매년 이날을 전후해 북한 각지에서는 갖가지 정치집회와 문화행사가 열린다. 당일 평양에서는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보고대회가 개최되고, 신문·방송 등 매체들도 특집 기사와 기념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마련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열흘 전 평양 청년중앙회관에서는 청년학생들의 경축모임이 개최됐고, 전국 직맹(직업동맹) 관계자들의 ‘정일봉에로의 답사행군’이 시작됐다. 또 각 지역별로 김정일의 사적비와 표지비(標識碑) 제막모임이 줄을 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밀려 6·15공동선언 발표 2주년 행사는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는 것이 평양을 다녀온 방북자들의 전언이다.

김정일의 ‘당사업 시작’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북한 안팎에서는 주민들의 ‘고난의 행군’은 끊이지 않았다. 탈북의 행렬은 멈출 줄 모르고, 베이징(北京)에서는 탈북자들의 연이은 외국공관 진입으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북한 안에서는 1996∼98년과 같은 최악의 식량난은 다소 모면했다고 하나 아직 곳곳에 굶주림의 그늘이 깊게 깔려있다. 일곱 살짜리 어린이 평균 키가 같은 나이 남한 어린이보다 20cm나 작고, 몸무게는 10㎏나 차이 난다고 국제 인권단체 사람이 전한다. 공장·기업소에서는 여전히 기계의 동음이 들리지 않는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제럴드 버크 대변인은 “북한 주민들이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먹을 수 있는 풀과 해초(海草)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배급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도 하루 150g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하루 최저 필요량 500g에 비하면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나마 명줄을 붙잡아 주던 뙈기밭마저도 30평 이상은 모두 몰수하고 있다고 하니 삶을 의탁할 최후의 언덕도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주민들은 장사 보따리를 메고 전국을 떠돌며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의 지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아무리 도와줘도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북한에 지원자들이 지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북한의 처지는 김정일의 ‘당사업 시작’과 무관치 않다. 그의 ‘당사업 시작’은 김정일 후계체제의 출발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그가 사실상 북한을 통치해 온 지난 38년은 결코 ‘자축할 만한’ 역사가 아니었다. 아직도 북한에는 체제위기의 증후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제 김정일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고 본다. 동독의 길과 베트남의 길이다. 동독은 주민들의 탈출사태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거부하다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베트남은 개혁을 통해 자생력을 키움으로써 떠났던 ‘보트피플’을 다시 돌아오게 했다. 김정일은 어느 길을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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