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환
/전 북한외교관·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그것은 대본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드라마가 4700만 국민을 이렇게 환호하고 절규하며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었을까? 월드컵 3회 우승의 이탈리아를 축구의 변방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이 격침시켰다.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대~한민국 짝짝짝’을 연호하며, 페널티킥을 얻을 때, 그리고 설기현이 동점골을 얻을 때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얻어내며 경기가 끝났을 때 TV를 지켜보던 나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이 대한민국이었다. 서울의 시청과 광화문 네거리, 신촌과 강남, 한강변, 그리고 저 멀리 독도와 마라도에서 울려퍼진 대한민국 연호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대한민국에 온 지 만 11년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항제철을 보면서 나는 저 멀리 요동반도를 호령하던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움과 용맹을 보는 듯하였고 대한민국에 대해 긍지를 느꼈다.

그러나 서울 생활에 차츰 적응해 가면서 실망 또한 커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남북으로 분단된 작은 나라가 영·호남으로 갈리고, 여야로 서로 대치하는 모습들은 어쩌면 외견상으로는 하나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북한 사회에서 살아온 나를 가슴 아프고 실망스럽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유럽의 강호들을 잇달아 무너뜨리면서 하나로 되는 우리 국민들을 보았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느낀 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빨간 티셔츠를 사 입고 고생스럽게 전철을 타고 시청 광장과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이 나라 사람들. 그들의 가슴 속 깊이 숨어 있었던 엄청난 애국심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폴란드·미국·포르투갈,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통해 나타난 우리 국민들의 에너지와 애국심을 보며 나는 “11년을 헛살았구나. 전후 잿더미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일궈낸 한국 국민의 저력을 아직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구나”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평양의 김정일 위원장도 스크린에 비춰지는 한국인들의 열정과 애국심을 보았을 것이다.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목청껏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4700만 국민의 모습을 보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의 눈에 비쳐진 남한은 동서로 갈라지고 빈부의 차이로 갈등하고 여야로 찢어지고 세대간으로 반목하고 친북과 반북으로 질시하는 그래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그런 한심한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김정일 위원장이 이제는 사태를 직시하고 서로 먹고 먹히는 통일을 추진하기보다는 남과 북 모두가 다같이 잘사는 평화공존적인 실제 협력의 통일정책을 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제 4강이다. 5위와 6위도 꺾었는데 8위를 꺾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우리 선수들 부담없이 잘 싸우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그 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강철같이 단단한 나라로 한 단계 승화시켜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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