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復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래로 써오는 말에 ‘상(賞) 뒤의 우환’이라는 것이 있다.
상은 받았는데 상 받은 사람도 심기가 편치 않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심기가 불편하다. 자연 손가락질이 오가고 욕설이 오가고, 마침내 편싸움이 벌어지고 원수가 된다. 공연히 상 때문에 그 좋은 사이가 상종 못할 사람으로 갈라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선인(先人)들은 모든 사람에게 축하 받지 못하는 상은 ‘우환거리’라 해서 절대로 받지 못하게 했다. 특히 국가에서 수여하는 훈장이나 포상일수록 그러하다. 훈공을 따지는 것부터가 편향된 시각이기 십상이어서 공정하고 객관적이지 않으면 그들만의 놀음, 그들끼리의 희희낙락이 된다. 더구나 잘못 수여된 훈장의 오염은 받아 마땅한 사람까지 사시안으로 보게 해서 그들 훈장의 가치마저도 급전직하로 떨어뜨린다.

우리는 ‘상 문화’가 너무 빈약하다. 거기에 왜곡까지 되어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정권이 주는 훈장과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이 혼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정권수여 훈장이 국가수여 훈장으로 둔갑한다. 이 둔갑은 한 정권이 내걸어 온 정책이 아직도 성패의 기로에 있는 데도 관계자들에게 훈장을 주는 데서다. 이런 훈장이야말로 특정 정권차원에서 수여하는 편향된 시각의 ‘정권훈장’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 예가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공이 크다는 이유로 수여하는 ‘6·15훈장’이고, 유가 다르긴 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 방화치사상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동의대사건 관련자들의 민주화운동 유공자 포상이다.

불과 보름 전(5월 27일)까지도 북쪽은 6·15공동선언(2항)은 바로 “연방제 통일에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우리들간에 촉발된 논쟁이 ‘남남갈등’을 더욱 치열케 했다. 그 뒤 북쪽이 뭐라고 말하고 정부가 나서 또 뭐라고 변명해도 국민의 의혹은 결코 가셔지지 않는 것이다. 어느 국민도 지금의 남북관계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지 않고, 어느 국민도 지금의 남북공존 상태가 6·15선언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미군이 주둔해 있고, 우리의 안보태세가 여전히 굳건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 간단없이 불타고 있는 데서 이나마의 평화도 유지된다고 국민은 생각한다. 그럼에도 6·15훈장이 수여된다면 그 훈장이야말로 아무도 동의하지 않고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권력자의 놀음이다.

오래 전부터 시내에는 또 다른 ‘포상’을 규탄하는 경찰차량이 시민의 눈을 끌며 돌아다닌다. “동의대 사건 관련자가 국가유공자라면 화염병에 타죽은 경찰은 빨갱이란 말이냐.” 이런 플래카드를 단 경찰차가 시내 곳곳을 누비며 동료의 죽음을 하소하고 다닌다면 그 포상은 도대체 국가가 수여하는 포상인가, 정권이 수여하는 포상인가.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어떻게 설명하고 또 어떻게 주장하든 그것을 납득해서 그 주장에 따를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누가 봐도 정도가 아니고 누가 생각해도 상식 밖의 일이라면 포상하는 사람이나 포상 받는 사람이나 ‘우환거리’ 양산자에 지나지 않는다.

상은 어떤 상이든 그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임무수행의 결과로써 주어지는 것이어야 하고, 훈공 또한 객관적으로 평가되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뉴하이(당대고관)들은 훈장이면 다 받으려 한다. 상을 가려 받게 하는 가통(家統)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경험 많은 올드하이들은 받아야 할 훈장과 받지 말아야 할 훈장을 엄격히 구분한다. 우환거리가 되는 상은 절대로 받지 않는다. 그들의 성장과정에 확립된 가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올드하이들의 지혜며 경륜이며 자제다. 그래서 그들이 받는 훈장에는 만 사람의 축하가 있고 만 사람의 박수가 있다. 찬양이 있고 지지가 있고 선망이 있다.

우리도 훈장을 가려 받고 거절할 줄도 아는 올드하이들이 나와야겠다. 가려 받지 않는 훈장만큼 할아버지 욕보이는 것이 없고, 덥석덥석 받는 훈장만큼 자손에게 부끄럼을 남겨주는 것이 없다. /연세대 교수·정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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