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아침만 해도 일본 언론들은 뜨거웠다. “탈북자가 오면 쫓아내라”라는 요지의 아나미 고레시게(阿南惟茂) 주중(駐中) 일본대사 발언이 각 신문 톱을 장식했다. '

일본 신문들은 당시 회의 참석자들을 통해 “탈북자를 받아들여 귀찮은 문제가 생기느니 인도적 문제가 생겨도 안받는 게 낫다”, “인도적 문제가 발생하면 내(아나미 대사)가 책임지겠다”는 사건 당일의 생생한 발언을 쏟아내 놓았다.

그러나 15일 석간부터 ‘생생한 목소리’는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16일 아침엔 자취를 감췄다. 대신 “아나미 대사는 당일 ‘일단 (탈북자가) 들어온 이상에는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를 보호하고 제3국 이동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는 ‘모범답안’같은 문어체(文語體)의 정부 발표문이 실렸다.

졸아든 기사 뒤에 각 일본 언론은 “그러나 우리 신문이 취재한 바는 다르다”는 간단한 해명만을 덧붙였다.

그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언론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15일 직접 일본 기자들에게 “함부로 코멘트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밤 늦게까지 서울주재 일본 대사관은 한국의 언론사들에 ‘반론권’을 요구했다.

‘인권’과 관련된 일본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질 위기다. 게다가 상대방인 중국에서는 정부측 해명을 흠집내는 언론보도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일본 정부로서는 부아가 치밀 만도 하다.

그러나 일본 외교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보다 ‘중국과의 외교상 실익’을 우선함으로써 보호해야 할 망명자가 잡혀가는 것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핏기 없는 기계적인 문장으로 언론의 증언을 봉합하는 일본이 그래서 더욱 안쓰럽다. 일본 정부에 과연 ‘인권’과 ‘진실’의 우선 순위는 몇번째가 되는 것일까.
/ 崔洽·東京특파원 po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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