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냉각된 전쟁’ 상태로의 돌입은 우리에게 선택지가 아닙니다. 휴전 또한 그렇습니다. 러시아는 전열을 정비해 우리 영토를 침략하러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군의 철수와 미래의 안전 보장, 그 외의 선택지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대통령실 건물에서 아시아 주요 매체와 만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일부에서 제기되는 협상론에 대해 격앙된 목소리로 책상을 치며 “손을 잘라서 다른 사람에게 주라는 말과 다름없다”고 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 침공으로 전면전이 발발한 후 전쟁이 장기화하자 몇몇 서방 국가가 제안 중인 협상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더 침공하지 않는 대신 러시아가 점령 중인 영토는 ‘현상 유지’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담았다고 알려졌다.

젤렌스키가 말한 ‘냉각된 전쟁(frozen conflict)’은 미래의 안보를 보장할 확실한 해법도 없이, 전쟁이 장기 소강 상태로 돌입하는 상황을 뜻한다. 1년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2년에 걸친 긴 교착 상태 끝에 남북 분단으로 결론 난 6·25전쟁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젤렌스키는 “전쟁의 일시 중단은 결국 우리 자녀와 손주 때 다시 ‘플레이(전쟁 재개)’ 단추가 눌러질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미래 세대가 그런 불안 가운데 성장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젤렌스키를 만난 날은 러시아가 키이우에 대한 사상 최대의 드론 공습을 단행한 지 사흘 후였다. 지중해 건너 진행되고 있는 또다른 전쟁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일시 휴전하고 진행 중인 인질 교환에 세계의 눈이 쏠린 때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우크라이나를 잊고 중동의 상황으로 관심을 전환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러시아가 바라는 바이고, 그들(러시아)이 원하는 결과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면 유감”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의 배후에 이란이 있다는 점을 지목하며 “이 두 전쟁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도 했다. 이란제 샤헤드 드론은 러시아에도 공급돼 우크라이나 공격용으로 쓰이고 있다.

미래 세대에 전쟁 불안감 줄 수 없어

지난 28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대통령실 건물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아시아 주요 언론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군의 철수와 미래의 안전보장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밝혔다. /세르기 한두센코(PIJL)
 
지난 28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대통령실 건물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아시아 주요 언론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군의 철수와 미래의 안전보장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밝혔다. /세르기 한두센코(PIJL)

우크라이나 대통령실로 가는 길은 경비가 삼엄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는 장소’란 설명처럼 군인이 겹겹으로 지키고 있었고 신원 확인 절차도 까다로웠다. 인터뷰 장소엔 휴대폰·녹음기를 포함한 웬만한 휴대품은 반입이 금지됐다. 필기구와 손목시계도 맡겨야 하고 유일하게 공책만 들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인터뷰실은 조명으로 밝았지만 문 밖 복도엔 불이 꺼져 있어 안내가 없다면 벽을 더듬어 걸어야 할 정도로 깜깜했다. 약속 시간보다 30여 분 늦은 젤렌스키는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모두와 악수하고 자리에 앉은 후 질문에 숨 쉴 틈 없이 답변했다.(그는 한 질문에 매우 길게 답했고 여러 주제를 섞어 말하기도 했다. 아래 문답은 이해를 돕기 위해 순서를 일부 편집한 것이다.)

-최근 거론되는 협상안은 절대 수용 불가입니까.

“글로벌 사회가 전쟁이 끝나길 원한다면 그것을 구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일시 중지나 협상을 통한 휴전은 ‘전쟁 종식’의 해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2014년 분쟁(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후 우크라이나·러시아의 충돌) 때 결국 협상을 통해 ‘민스크 협정’이라는 것을 맺고 분쟁을 동결했습니다. 국제 사회가 ‘휴전 좀 합시다’라고 밀어붙였고 우리에게 ‘러시아와 마주 앉으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론 잘 풀리지 않았고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물며 지금처럼 러시아 군대가 우리 영토에 있는 상태로, 우리 영토를 그들에게 일부 주라는 방식으론 협상이 불가능합니다.”

-지난여름 시작해 기대를 모았던 대반격의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도 나오는데.

“우선 우리가 이미 지난해 하르키우와 헤르손을 매우 신속해 되찾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매우 큰 영토이자 우크라이나에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국제 사회가 이야기하는 ‘빠른 돌파구(quick breakthrough)’였지요. 이후 무기가 부족해졌고, 무기 부족이 고착화됐는데 그 상황은 매우 끔찍했습니다. 국민과 군대의 피로감도 커졌습니다. 반격을 위해 더 많은 여단과 무기를 추가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추가 반격을 여름으로 미뤘습니다. 되돌아보면 지난 늦겨울에 밀어붙였으면 더 수월했을 것도 같습니다. 러시아가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죠.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지원받은 모든 도움에 감사하지만, 시간이 우리를 속였고 당시 상황(국제 사회 무기 지원 지연 등)이 우리 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상황을 ‘교착 상태’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우크라이나 총사령관 발레리 잘루즈니는 최근 이코노미스트에 우크라이나전의 상태가 소모전으로 돌입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러시아가 (지난겨울을 거치며) 겹겹으로 요새를 구축해둔 영토를 탈환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완전한 하늘 장악으로 상황은 복잡해졌습니다. 우리의 군대와 장비가 어디로 가는지 숨기기가 매우 힘겹다는 뜻이지요. 이런 이유들로 우리는 매우 천천히 전진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러, 하늘장악… 軍장비 숨기기 힘겨워

-러시아에 대한 북한의 무기 지원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북한의 무기 공급은 사실이고,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122㎜·152㎜ 자주포 포탄과 125㎜ 전차 포탄을 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라드(GRAD) MRLS(다연장발사시스템)’와 이에 맞는 시스템도 분명히 보내고 있습니다. 이 무기들은 구(舊)소련의 표준에 맞춘 것이고, 구소련 시대에 생산됐습니다. 러시아는 무기를 생산해 북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공급함으로써 관계를 돈독히 해왔는데, 이번에 북한은 소련이 북한에 공급했던 모든 것을 역으로 러시아에 돌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북한이 수백만 발의 포탄을 보유하고 있고 얼마나 더 많은 양을 공급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거래는 1년 반 넘게 진행돼온 큰 규모의 전쟁을 치르기 버거울 정도로, 러시아가 충분한 탄약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최전방 부대 방문한 젤렌스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운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30일(현지 시각) 북동부 하르키우의 최전방 부대인 쿠피얀스크 지휘소를 방문해 전황을 보고받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최전방 부대 방문한 젤렌스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운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30일(현지 시각) 북동부 하르키우의 최전방 부대인 쿠피얀스크 지휘소를 방문해 전황을 보고받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북한 군인이 참전 중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입니까.

“러시아군엔 정말 다양한 여권을 가진 다양한 용병이 섞여 있습니다. 심지어 죄수들까지 러시아군에서 싸웁니다. 100% 증거가 없으면 북한군 파병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명 이상의 북한 포로를 확보하게 되면, 그때 확실히 밝히겠습니다.”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러시아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승리의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승리를 믿지 않고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승리를 믿는다면, 반드시 승리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나라들에 ‘10단계 평화 구상’이라는 로드맵을 제시했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이 비전에 동참하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굳은 표정과 단호한 목소리를 잠시 풀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사람들이 왜 평화롭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무기를 들 때마다 반드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전쟁은 결국 국적이나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인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만이 전쟁이 초래할 결과에 무심할 수 있을 겁니다.” 한 시간 동안 우크라이나어로 인터뷰한 그는 “민주주의를 위하여(For democracy)!”라고 영어로 외친 후 들어올 때와 같은 빠른 걸음으로 방을 휙 떠났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하기 13년 전인 1978년,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크리비리흐에서 태어났다. 크리비리흐 국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젤렌스키는 2015년 자신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TV 드라마 ‘국민의 종’을 통해 단숨에 국민적 스타가 됐다. 드라마에서 부패 정치인을 몰아내는 대통령을 맡았던 그는 2019년 5월 대선에서 73% 지지를 받으며 진짜 대통령이 됐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위기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리더십으로 우크라이나는 물론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 시사 주간 타임은 젤렌스키에 대해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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