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평양에서 열린 임진강 무단 방류 방지 대책 회담에 참석하였다. 회담에서 북측은 ‘선(先) 물자 지원, 후(後) 임진강 현장 조사’를 주장하며 남측의 ‘선 현장 조사, 후 물자 지원’ 안을 거부하였다.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정회를 하고 서울의 훈령을 기다리는 동안 대동강을 둘러봤다. 대동강변에는 미국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전시되어 있었다. 북한 안내 참사에게 미국에게 돌려주는 것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미제의 침략을 물리쳤고 북한 주민들에게 확실하게 대미 적개심을 심어주는 선전 도구를 돌려줄 의사는 없어 보였다. 1968년 동해에서 북한이 나포한 중량 106t, 길이 54m의 함정을 어떻게 원산항에서 대동강으로 이동시켰는지 문의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함정을 분해해서 육상 이동을 했는지 야간에 제주도 남측 공해상을 통해서 서해로 이동시켰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이후 북한은 2013년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에서 대동강 지류인 보통강변으로 옮겼다.

사진=조선일보DB.  그래픽=송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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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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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 유엔주재 북한 대사는 2019년 5월 미국이 불법 물자 수출 혐의로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호를 압류한데 대해 즉각 반환을 요청했다. 그러자 당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북한이 불법 외화 벌이에 나선 선박의 반환을 요구하려면 푸에블로호 송환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푸에블로호 반환 주장은 나포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주제다. 반환 주장이 가장 먼저 제기된 곳은 푸에블로호의 어원이 된 푸에블로시가 속한 콜로라도주였다. 콜로라도주 지역 언론들은 일제히 푸에블로호 승조원 인터뷰 보도와 기고를 통해 함정과 북한 선박을 맞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푸에블로호 반환 요구는 2018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당시에도 제기됐다.

승조원 83명이 승선했던 푸에블로호는 해안에서 40km 떨어진 동해상에서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됐다. 김일성은 1968년 1월 푸에블로호 나포에 이어 4월에는 비무장 상태인 EC-121 정찰기를 영해 밖에서 격추시켰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베트남 전쟁에 이어 동북아에서 또 하나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맞대응하지 못했다(’키신저 외교와 국제정치’ 2020). 평양은 워싱턴의 약점을 파고 들었고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 지역에서 대표적인 반미(反美) 상징 지역 중의 하나는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신천박물관이다. 내부에는 미군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다룬 조형물과 그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북한은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8일부터 12월 7일까지 신천군에서 미군과 국군이 주둔하면서 3만 50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왜곡 선전하였다. 미군 문서는 당시 신천은 북진 작전 중에 하루 정도 거쳐 지나갔던 장소로서 다수의 양민을 만날 수도, 학살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북한은 지난 5월 2일 한미정상회담의 ‘워싱턴 선언’을 비난하며 청년 학생들을 동원하여 신천박물관에서 ‘복수결의모임’을 진행했다.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전시하고 신천박물관을 조성해 반미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김씨 일가 통치 체제에 반미 선전 선동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김씨 일가는 통치 체제의 존립 명분으로 처음부터 ‘미 제국주의 저항’ 과 ‘그 괴뢰 치하에 놓인 남조선의 해방’을 내세웠다.

지난 6일 통일부가 공개한 1971년 11월~1979년 2월 남북회담 문서(1678쪽)에 따르면 북한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주한 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이유가 ‘주한미군 철수’에 있었다는 점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전후해 진행됐던 남북 당국자 간 대화를 통해 재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북한은 전술을 변경하였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최고지도자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2년 1월 미북 간 평화 협정이 논의될 당시 김일성은 김용순 노동당 비서를 미국으로 보냈다. 김 비서는 아널드 캔터 미 국무차관에게 “북미 수교를 하면 주한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제안하면서 “통일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속내를 간파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정일은 2000년 6월 14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주한 미군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되어있다. 김정일은 미국에도 유사한 입장을 표명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2003년 발간한 회고록 ‘마담 세크리터리(Madam Secretary)’에서 2000년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김정일을 만나 주한 미군 주둔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묻자 그가 주한 미군의 역할을 인정하는 취지로 답변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국무 장관을 지낸 폼페이오는 올해 1월 발간한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마라’에서 2018년 3월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시절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김정은이 중국에서 북한을 보호하려면 주한 미군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은 왜 김 전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폼페이오 장관에게 주한 미군의 주둔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했을까? 그들의 주장이 과연 그들의 본심이었을까?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간부와 인민들에게 그런 입장을 한 번이라도 표명한 적이 없다. 한미 양국의 고위층을 흔드는 유인 전술의 일환일 뿐이다. 김씨 일가는 한미 양국 지도자들의 대북 경계심을 이완시키는 통일 전선 전술을 구사한 것이었으나 이들은 최고지도자의 발언 의도보다는 자신에게 특별한 언급을 했다는 데만 주목하였다. 평양의 속내는 주한 미군 주둔 주장을 내세워 미국과의 수교로 대북 제재를 해제시키는 것이었다.

김씨 일가를 만나 주한 미군 주둔 동의 입장을 전해 들은 한미 양국의 지도자들은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는 포용 정책에 주력하였다. 북한이 대북 경계심을 약화시키는 미끼(decoy)를 던져 유혹하는 전술이 빛을 발한 것이다. 멀리는 중국 국공(國共)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제시한 항일 공동 전선이나 베트남 전쟁 종결을 합의한 1973년 ‘베트남 평화 협정’ 등도 공산주의자들이 상대가 구미를 가질 만한 밑밥을 던져 통일 전선 전술로 무너뜨린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뼛속까지 반미(反美)로 체화된 김씨 일가를 비롯한 평양 지도부가 실전에서 주한 미군의 주둔에 동의할 리는 없다. 최고지도자의 미군 주둔 발언은 평양의 통일 전선 전술이 대중뿐만 아니라 지도층을 대상으로도 전개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에 휘말린 것이 문재인 전 대통령의 종전 선언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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