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5일 저녁 개성공단에서 ㈜리빙아트가 생산한 ‘통일냄비’ 1000세트가 서울시내 백화점에서 판매되었다. 당일 완판되어 구매하지 못한 소비자는 대기표를 받는 등 인기 폭발이었다.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냄비지만 개성산(made in gaesung)으로 ‘통일’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모자란 물량은 서울에서 생산한 제품으로 충당했다. 소비자들은 냄비를 통해 남북한 경제협력과 통일의 이미지를 상상했다.

그래픽=송윤혜
그래픽=송윤혜

개성산이었지만 공장 건설은 물론 철판도, 냄비 주조용 틀도 서울에서 가져갔다. 공장 가동의 핵심이었던 전력도 남측 문산변전소에서 10만kw를 송전하였다. 통신은 KT, 용수는 수자원공사 등 모든 인프라에 남북협력기금이 1조원 투자되었다.

평당 15만원의 저렴한 토지 사용료와 100달러가 안 되는 근로자 월급이 고임금에 시달리던 남한 기업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범단지 15개 입주업체는 초기 투자 부담을 무릅쓰고 공장을 지었다. 남북 당국은 투자 보장, 이중 과세 방지, 청산 결제, 상사 분쟁 해결 등 수백쪽에 달하는 4대 경협 합의서에 서명하는 등 공단의 안전성 담보에 주력하였다.

공단은 북한 영역에 위치한 관계로 동남아 등 다른 공단과 달리 통제가 심했고 자유로운 출입이 어려웠다. 근로자들이 한국어를 이해하는 것은 장점이지만 보위부의 감시는 큰 걸림돌이었다. 매년 임금 상승 속도도 시간이 갈수록 당초 합의와 달리 빨라졌다. 현장에서는 공장의 효율적 가동보다는 보위부의 체제 수호가 우선이었다. 지리적 이점과 저렴한 인건비는 장점이었지만 기업인들의 자유로운 통행 제한을 비롯한 각종 규제는 중국과 동남아 공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태였다.

공장을 가동하는 와중에도 북한 정찰총국은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라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역대 정부는 위기 상황에서도 개성공단이 북한 개혁·개방의 신호탄이라는 기대감에 가동을 지속하였다. 오후 3시에 5만여 근로자 1인당 4개씩 제공되었던 초코파이 간식이 개성 장마당에 유통되면서 자본주의가 부활하기를 희망하였다.

필자는 개성공단 입주기업 심사위원을 하면서 이질적인 경제체제하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이 교과서 이론과는 다르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사장이 월급을 근로자들에게 직접 지급하는 직불제는 불가했고 당국이 지정한 은행에 일괄 입금하였다. 2007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강화도 한강 하구 모래사장에 나들섬 공단을 건설하여 북한 근로자들이 출퇴근 방식으로 일하게 하는 구상으로 개성공단의 근본적인 리스크를 해결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북한이 근로자를 남측 공단에 송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2016년 1월 4차 핵실험과 2월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로 개성공단이 폐쇄될 때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24개 입주기업은 온갖 불합리한 관행을 견디며 공장을 가동하였다. 핵무기 위협이 실존적으로 심화되는 상황에서 공단 가동은 점차 한계를 보였다. 남북 관계 부침에 따라 북한은 일방적으로 기업의 상주 인원을 제한하고 3차례에 걸쳐 통행을 차단했다. 기업인의 무단 억류도 발생하였다. 2013년에는 한미군사훈련 및 최고 존엄 모욕 등의 문제로 5개월간 공단 가동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핵무기 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유엔 대북 제재도 11건 발효되었다. 경제협력이 정치적 화해를 가져온다는 기능주의(functionalism) 접근은 한계를 보였다. 공단 가동 중단에 실망했는지 2020년 6월 북한은 개성공단 내 235억원이 투입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전격 폭파했다. 연락사무소 바로 옆에 있는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도 심하게 훼손되었다.

북한이 개성공단 내 한국 자산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정황은 위성사진과 북한 관영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포착되고 있다. 최근 통일부가 개성공단 무단 사용에 대해 강력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오히려 개성공단 내 공장 가동을 30여 곳으로 확대했다. 북한이 개성공단 내 한국 자산을 무단으로 사용해 ‘쿠쿠 밥솥’을 생산, 평양의 백화점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지난달 보도했다.

북한의 개성공단 무단 가동은 소탐대실이다. 북한은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경제특구를 20여 곳 지정하여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수백쪽에 달하는 경협 합의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공장 무단 가동은 ‘투자 보장에 관한 합의서’와 ‘개성공업지구법’을 위반한 것이다. 기본적인 투자와 분쟁 해결 절차도 지키지 않는 북한에 투자할 기업을 찾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통일의 마중물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거액을 투자했던 개성공단은 평양이 비핵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면 통일 이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통일냄비처럼 순식간에 달아올랐던 개성공단은 일순간에 막을 내렸다. 북한의 주장대로 정치·군사 분야의 ‘근본 문제’ 해결 없이 경제협력을 성공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었다. 무단 가동은 정세가 안정되면 혹시나 개성공단이 재가동될까 기대했던 기업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북한은 중국 업체를 상대로 개성공단에 투자 및 일감을 유치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이 여의치 않으면 우리 기업 시설들을 무단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중국에 팔아넘기려는 시도까지 검토한다는 소문이다.

통일부는 ‘개성공단 무단 가동’에 대해 북한에 손배소를 검토하고 있지만 공단의 태생적인 한계로 실효성은 떨어진다. 공단이 우리의 관할권이 미치지 못하는 북측 지역에 위치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결국 발목을 잡았다. 모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의 운명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으나 민족이 이념보다 앞설 수 있다는 환상으로 거액의 남북협력기금을 쏟아부은 후과(後果)다.

지난달 관광공사와 현대아산이 투자한 금강산호텔과 금강산역 등 시설물들이 북측에 의해 완전 철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2019년 김정은이 현장 시찰에서 “너절한 남측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한 결과다. 야심차게 추진했던 경협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낭만적 접근에 대한 원인 분석이 필요하다.

일찍이 조국 헝가리에서 사회주의를 체험하고 하버드대에서 강의했던 석학 코르나이(J. Kornai) 교수는 그의 명저 ‘사회주의 정치경제이론’에서 체제와 권력의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해야 사회주의 국가와 경제협력이 성공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석학의 조언을 떠나서도 상식적으로도 판단이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적 선동이 남북 관계에서도 횡행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