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대선이 종료되자마자 당시 노무현 정부의 정보기관 대북 담당 책임자와 호텔 안가(安家)에서 만났다. 그해 여름부터 임기 말 무리한 정상회담은 차기 정부에 큰 부담이라는 입장을 수차례 전했지만 막무가내였고, 청와대와 국정원은 기어코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임기 말 정상회담은 반드시 밀당이 있었고 대가 지원을 논의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북한의 대남 전략에서 무상 남북 정상회담은 절대 불가다. 10·4 평양 정상회담 선언에서 어디까지 이면 합의가 논의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평양 선언을 주도한 대북 책임자는 전임 사장이 약속한 사항은 후임 사장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었다. 대학 시절 민법 강의 시간에 들은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구절이 떠올라 정상회담의 이면 합의가 부동산 매매 계약과 동일한 성격인지 헷갈렸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광명성절을 기념해 진행된 내각과 국방성 직원들 사이의 체육 경기를 관람했다고 18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뉴시스
 
북한 조선중앙TV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광명성절을 기념해 진행된 내각과 국방성 직원들 사이의 체육 경기를 관람했다고 18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뉴시스

새 정부에 전달하는 인계인수의 핵심은 일차로 옥수수와 쌀 등 식량 5만t을 정부 출범 전에 지원하는 것이고, 하반기에도 유사한 내용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북측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라고 경고도 잊지 않았다. 대북 책임자는 8항으로 이루어진 공식 합의문에서 남과 북은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 어로 구역과 평화 수역 설정 합의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면담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대통령 당선인에게 보고하였다. 당연히 당선인은 지원에 부정적이었다. 10년 만의 정권 교체라 정부 출범 전 관심사는 조각과 인사였다. 경제 살리기가 시급한 화두였던 만큼 북한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졌다. 신임 국정원장은 전임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 맡았고 대북 관리는 전략 부재 상태였다.

새 정부는 ‘비핵·개방 3000 구상’의 선언과 이행을 북한에 촉구하였으나 북측은 대남 비난에 주력하였다. 정책의 초점은 전임 정부들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대북 정책의 문제점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의 원칙하에 구체적인 경제 교류를 명기한 10·4 선언은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든다며 사실상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했다. 비핵화에 대해서는 6자 회담 합의 사항을 이행하도록 노력한다는 허망한 문장으로 기술하여 북핵을 방치한 만큼 절대 수용할 수 없었다.

10·4 선언은 새 정부의 발목을 확실하게 잡았다. 평양 주석궁은 청와대가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는다며 물 위는 물론 전통적인 물밑 대화조차 팽개쳤다. 갑을 관계가 뒤바뀌었다고 판단한 평양 권부는 기습 도발을 준비하였다. 새 정부 임기 첫해에는 남측 내부의 국방 태세를 점검하더니 집권 2년 차인 2009년 들어서 기습의 징후가 미세하게나마 포착되었다. 전 정부의 대북 담당자는 북한의 반발이 예상외로 강하다는 첩보를 전해 왔다. 북한 통전부는 기습 도발을 하되 주체를 알 수 없게 하여 남남 갈등을 유발하는 고도의 심리전까지 기획하였다.

/그래픽=김현국
 
/그래픽=김현국

DJ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10년 동안 진행된 화해 협력 정책은 국방부의 대북 마인드를 이완시켜 놓았다. 10년 동안 교류 협력에 초점을 맞추었던 대북 정책으로 군부대 내에서조차 북한은 적이 아니라는 정훈 교육에 여념이 없었다. 군 수뇌부는 바뀌었으나 현지 부대장들은 10년 만의 정책 변화에 곧장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대응 태세 전환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3년 차 임기에 들어선 남측 정부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평양 통일전선부는 2010년 공격 디데이(D-Day)를 결정하였다.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하던 3월 26일 천안함을 향한 어뢰 기습 공격이 이뤄졌다. 10·4 선언으로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겠다는 합의를 강조했던 책임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평화의 바다가 피바다가 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연평도에 대한 포격이 발생했다. 전자는 은밀하게, 후자는 공개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남측을 혼란에 빠뜨렸다. 기습 공격으로 우리 장병 46명이 희생되었으나 북측 통전부의 전략대로 남측 내부의 남남 갈등이 일어났다.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인 명백한 도발인데도 공격 주체 갑론을박에 따른 남남갈등으로 북한의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기습 공격이 이뤄지기 전까지 2년간의 소강 상태는 다각도의 기습 도발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으나, 적에 대한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이뤄지지 않았다.

금년은 13년 전 천안함 폭침 사태 못지않은 안보 여건으로 기시감(旣視感)이 들게 한다. 얼마 전 야당 대표는 10·4 선언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천안함 폭침의 단초가 되었던 평양 선언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니 유구무언이다. 총선이 있는 내년보다는 역설적으로 올해가 최적의 도발 시기다. 김정은으로서는 행동을 전개할 시점이다.

북한은 18일 김정은의 명령으로 ICBM ‘화성-15형’을 기습 발사하는 등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도발은 대남과 대미 두 방향에서 전개된다. 대미(對美) 전략은 강대강 구도 속에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도발로 바이든 정부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북한 건군절에 등장한 괴물 고체 연료 ICBM 등은 대미 압박 카드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7일 의회 연두교서 연설에서 북한(North Korea)이라는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김여정은 “남조선 것들을 상대할 의향이 없다”고 했지만, 평양 총구의 방향은 워싱턴이 아니고 서울이다. 바다와 육지에서 구체적인 기습 도발로 이어질 것이다. 무인기로 혹은 잠수함으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하거나 비무장지대(DMZ)를 노릴 수 있다. 도발은 남남 갈등을 야기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군의 선제적인 대응과 함께 민간도 동참해야 한다. 7년 만에 윤 대통령이 주재한 중앙통합방위협의회 개최는 하수상한 시절에 민·관·군·경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 시의적절한 조치다.

건군절 심야에 김정은 부인 리설주는 ICBM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나타났고, 딸 김주애는 열병식장 상석에 앉는 등 평양 선전선동부의 극장 정치(cinema politics)는 가족오락관 수준이다. 잊히는 것이 두려운 김정은은 어린 딸을 동원하여 야당 정치인의 표현처럼 신파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다. 4대 세습 후계자가 누구일까라는 신파 드라마에 신경 쓰다가 정작 북한의 기습 도발에 허를 찔리지 않도록 예의 주시해야 할 시점이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평양도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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