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작년 12월 제주도에 있는 진보 정당 지역위원장 A씨의 자택을 압수 수색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그래픽=김하경
 
국가정보원이 작년 12월 제주도에 있는 진보 정당 지역위원장 A씨의 자택을 압수 수색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그래픽=김하경

제주 간첩단 혐의 ‘ㅎㄱㅎ’ 사건을 수사 중인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북한 연계 지하조직이 경남 창원과 진주, 전북 전주 등 전국 각지에 결성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는 것으로 9일 알려졌다. 지역별 지하 조직을 총괄하는 상부 조직의 명칭은 ‘자주통일 민중전위(이하 자통위)’로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은 이들 조직들이 각 지역 정치·사회 단체나 건설·화물 등 부문별 노조에 침투했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 1992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이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수사 당국 등에 따르면, 국정원과 경찰은 작년 말 제주에 이어 창원, 진주, 전주에서도 북한 지령을 받은 혐의 등으로 관련자들의 거주지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들은 ‘ㅎㄱㅎ’과 마찬가지로 북한 노동당 직속 대남 공작 부서인 문화교류국의 지령을 받아 지하 조직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반정부 및 이적 활동 등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북한 대남 공작원과 외국 이메일 계정이나 클라우드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해 교신하는 일명 ‘사이버 드보크(Cyber Dvoke)’ 같은 신종 수법으로 수년간 북측과 교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당국은 ‘자통위’가 전국 각지에 흩어진 북한 지하조직을 총괄하는 중앙 조직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지난 11월 창원에서 활동하는 진보·좌파 단체 관계자 최소 4명의 거주지 등을 압수수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압수수색 영장 등에 따르면, 이들은 2016년 무렵 창원에 ‘자통위’를 설립하고 수시로 북측 지령문을 받은 뒤 반미 집회, 반보수 투쟁 시위 등을 벌여온 혐의를 받고 있다. 자통위는 ‘ㅎㄱㅎ’ 등 제주·진주·전주 등 각지에 있는 지하조직과 연계해 민주노총 등 합법 단체를 장악하는 데 주력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실제 ㅎㄱㅎ에 발신한 지령문에서 “민노총 산하 제주 4·3통일위원회를 장악하라” “노조들과 진보운동 단체들을 발동해 진보 정당 후보들을 밀어주라”고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북 지하조직들은 노조, 정당 등 합법적인 단체에 침투해 조직을 장악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방첩 당국은 북한이 이번 지하조직의 중앙 거점을 서울이 아닌 창원에 설립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비수도권 지역이라 노조 등에 침투가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창원은 한화디펜스, LIG넥스원, 현대 로템 등 주요 방산업체와 국방과학연구소 제5기술연구본부, 육군종합정비창 등 국방·방산 관련 기관이 모여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지난 2021년 적발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 때도 북이 제도권 단체를 지하조직의 합법적 활동 공간으로 이용한 정황이 나왔다. 이번에는 전국 각지에서 북의 제도권 침투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충북동지회 사건에서 북측과 접촉했던 청주 지역 노동계 인사들은 2020년 10월 당시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었던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면담해 대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수사 당국은 창원 조직과 ㅎㄱㅎ, 전주 지부 등의 연계 활동 여부도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첩 당국은 서울에도 북 지하조직이 설치됐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실제 수사 과정에서 지하조직원들이 서울에서 만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자통위와 ㅎㄱㅎ 등은 “정부가 실정(失政)을 덮기 위해 공안 몰이를 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자통위 측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2018년 창원 세계사격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북한 선수단을 응원하고, 개성공단 재가동 촉구 집회, 친일·적폐청산 집회 등 시민단체의 고유 활동을 했을 뿐”이라면서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배후 조종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사 당국 측은 “이들이 제3국에서 북한 대남 공작조와 접촉하고, 지속적으로 북한 지령문을 온라인을 통해 수령한 구체적 정황을 포착했다”면서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법원도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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