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입학한 육사 79기 A 생도는 4년간 ‘한반도의 전쟁(6·25전쟁사)’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다. 6·25전쟁사는 ‘선택’ 과목이었지 ‘필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무처에 물어봤지만 “수강하지 않아도 졸업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대신 그가 필수로 들은 수업은 ‘스트레스와 건강’ ‘군대 문화의 이해’ ‘국방경영학’ ‘지휘관리 세미나’ 등이었다. 그는 내년 3월 소위로 임관해 일선 부대 소대장이 된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1일 오전 충남 계룡대 연병장에서 열린 제74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식전공연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뉴스1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1일 오전 충남 계룡대 연병장에서 열린 제74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식전공연을 보며 환호하고 있다. /뉴스1

육사 졸업 필수 교과목에서 ‘6·25전쟁사’가 사라졌다. 본지가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육사는 2019년부터 6·25전쟁사, 북한의 이해, 군사전략 등 일부 교과목을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꾸는 교과 과정 개편을 시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1953년 6·25전쟁 휴전 이래 60여 년간 모든 기수의 육사 생도들이 선배들의 참전 일화 등이 담긴 6·25전쟁사를 배웠지만, 2019년부터는 이러한 ‘전통’이 끊겨버린 것이다. 공사와 해사는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육사는 2019년부터, 육군3사관학교(3사)도 지난해부터 6·25전쟁사와 북한학을 필수 과목에서 뺀 것이다. 육사 37기 출신인 신 의원은 “국가관·안보관·전략적 사고 형성 등을 위해 편성한 기초 필수 교과에서 다른 것도 아닌 6·25전쟁사가 제외된 것은 충격적인 문제”라면서 “지금이라도 바로잡혀야 한다”고 말했다. 육사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자율적 학습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의 육사 홍보물 일부.
 
국가보훈처의 육사 홍보물 일부.

논란의 교과 개편을 주도한 이들은 문재인 정부 시기 육사에서 주요 보직을 맡은 교수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국방위 관계자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이듬해부터 일종의 ‘육사 개혁 사업’이 본격화됐다”면서 “6·25전쟁사, 북한의 이해, 군사전략을 기초·필수 교과목에서 빼버리는 2019년 교과 과정 개편도 그 개혁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라고 말했다. 육사 내부에선 이 같은 개편에 반대하는 의견도 제기됐지만, 묵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개편으로 6·25전쟁사 수강생은 급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사는 국문학·수학과 같은 일반 전공뿐 아니라 ‘국방전략’ ‘지휘관리’ ‘군사과학’ ‘군사공학’ 등 4개의 군사학 전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개편에 따라 6·25전쟁사는 4개 군사학 전공자 모두가 필수로 듣던 기초 교과목에서 빠지고, ‘국방전략’ 전공자만 필수로 듣는 교과목으로 분류됐다.

국회 국방위 소속인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 14일 경기 용인시 지상작전사령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의 육군지상작전사령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2022.10.14/뉴스1
 
국회 국방위 소속인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 14일 경기 용인시 지상작전사령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의 육군지상작전사령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하고 있다. 2022.10.14/뉴스1

나머지 지휘관리·군사과학·군사공학 등 3개 전공자는 6·25전쟁사를 듣지 않아도 졸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육사 79기 생도 총 280여 명 가운데 75%가 6·25전쟁사 수강을 자율로 결정하는 것이다. 대신 양성평등, 독서 프로그램 등이 기초 필수 수업으로 새로 편성됐다. 필수 수업에는 ‘전쟁의 역사’가 남아있긴 하지만, 동서고금의 역사를 총망라한 것으로 6·25전쟁은 극히 일부만 다룬다. 미 웨스트포인트, 프랑스 생시르 사관학교 등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엘리트 군사학교는 자국의 전쟁사를 생도들에게 필수적으로 가르치는데, 이 대열에서 육사와 3사가 이탈한 것이다. 한 예비역 육군 대장은 “현재 육사는 1945년 군사영어학교의 후신(後身)으로 사실상 6·25전쟁과 함께 태어났다고 봐도 무방한데, 육사에서 6·25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뿌리를 잊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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