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김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 코리아미션센터장이 이달 초 세미나에서 ‘문재인 정부 임기 내 남북 정상회담이 또 열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한 뒤 “아마도 온라인이고 대면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김 전 센터장은 2018년 미·북 정상회담의 막후 주역이었다. 최근 남북 모두 ‘정상회담’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형식은 대면 아닌 화상 회담이 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정부 소식통은 “북의 코로나 포비아(공포)가 여전히 심해 대면 회담하자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고 했다. 북은 어떤 상황일까.

평양역 앞에서 북한 방역 요원이 주민 손에 소독제를 뿌려주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코로나 봉쇄와 국제 제재, 수해 등이 겹치면서 북한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평양역 앞에서 북한 방역 요원이 주민 손에 소독제를 뿌려주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코로나 봉쇄와 국제 제재, 수해 등이 겹치면서 북한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단둥 北사업가, 아내 사망해도 귀국 못 해”

북·중 교역의 70%가 이뤄지는 중국 단둥의 조선족 사업가는 “작년 여름쯤 북한 무역일꾼의 아내가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는데 국경 봉쇄 때문에 남편이 아직도 단둥에 있다”고 했다. 북 노동력이 새로 들어오지 못하면서 기존 북 노동자들의 월급이 중국인의 90% 수준까지 올랐다는 얘기도 있다. 북은 2004년 사스와 2014년 에볼라, 2015년 메르스가 유행할 때도 국경을 닫았지만 국경 도시 중심의 밀무역은 완전히 차단하지 못했다. 강폭이 10여m에 불과한 압록강·두만강 상류를 야밤에 몰래 넘는 것까지 단속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특수전 부대를 보내 국경을 봉쇄했다고 한다. 주한 미군 사령관도 ‘국경에서 밀수꾼 사살 명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평양에서 6년 8개월째 근무 중인 리진쥔 중국 대사는 역대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중국이 원해서가 아니다. 올 1월 후임으로 왕야쥔 대외연락부 부부장(차관)이 결정됐지만 국경 차단으로 교대를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주재 지재룡 북한 대사도 마찬가지다. 지난 2월 후임인 리용남 대사가 베이징에 부임했는데도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두 명의 대사가 8개월째 같이 지내는 것이다. 작년 말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바닷물이 코로나에 오염됐을까 봐 어업과 소금 생산을 금지했다고 한다. 철새도 막는다고 한다.

 

코로나 의심 환자는 ‘고려장’ 처리

북한 공포에 이유는 있다. 2019년 5월 북은 세계동물보건기구에 아프리카돼지열병 한 건이 발생했다고 알렸다. 그런데 그해 9월 국정원은 “평안북도 돼지가 전멸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방역·의료 시스템이 무너진 북에서 바이러스 확산은 체제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 김정은이 ‘기저 환자’인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살을 뺐다고는 하지만 비만일수록 코로나에 취약하다는 연구가 있다. 북에선 김씨 일가 안전이 최고의 가치다. 탈북 외교관은 “김정은이 대면 회담에 나갔는데 CIA 등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몰래 퍼뜨리면 끝장 난다는 걱정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보 소식통은 “코로나 의심 환자가 북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고 했다. 지역별로 격리 시설을 만들어 놓고 열·기침 증세를 보이면 바로 수용한다고 한다. 진단 장비는 절대 부족하다. “약과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죽어나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고려장’인 셈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은 얼마 전 “전 세계에서 백신이 없는 나라는 아프리카 국가인 에리트레아와 북한 두 곳뿐”이라고 했다. 북한은 코백스(국제 백신 협력체)가 중국산 백신 공급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믿을 만한 ‘미국산’을 달라는 것이다. 코로나 의심 환자는 있고 백신은 없는 상황에서 북한 선택지는 외부 접촉 금지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방역은 ‘기저 환자’ 김정은의 유일한 업적

이번 주에도 북한은 코로나 확진자가 ‘0명’이라고 세계보건기구에 보고했다. 4만2773건을 누적 검사했지만 전원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작년부터 코로나 방역을 진두지휘한 결과라고 북은 내부 선전할 것이다. 경제도, 외교도 전부 엉망인 상태라 코로나 방역이 김정은의 유일한 업적이 됐다. 북은 김정은 한마디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경직된 체제다. 김정은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밑에서 누구도 ‘방역 완화’를 먼저 거론할 수 없다. 유성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지금 한국과 대면 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김정은표 방역’에 이견을 말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북에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직접 만나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북 주민들은 ‘봉쇄가 곧 풀릴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한번 풀어진 방역 긴장은 다시 죄기 어렵다.

김정은은 한미 정상과 여러 차례 대면 회담을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북 주민들이 기대했던 제재 해제도, 대규모 경제 지원도 얻지 못했다.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나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종전 선언’이 북 주민의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다. 대면 아닌 화상 회담일 경우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류·탈북 차단은 방역 봉쇄의 부수 효과

김정은이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부수적 효과를 챙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 북 정권은 한류(韓流) 유입이 코로나만큼 위험하다고 여긴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탈북을 결심했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배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청년 세대의 이반이 문제다. 그래서 작년 12월 한류 처벌을 강화한 ‘반동사상 문화 배격법’까지 제정한 것이다. 남편을 ‘오빠’라고 불러도 징역 2년이다. 국경 봉쇄 때문에 새로운 K팝이나 드라마 유입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탈북 억제 효과도 크다. 올해 3분기까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은 48명에 불과하다. 작년엔 229명이었고 코로나 이전인 2019년만 해도 1047명이 입국했다. 방역으로 코로나뿐 아니라 한류와 탈북까지 차단하는 것이다.

[北, 19년만에 ‘돈표’ 발행… 주민 보유 달러 반강제 흡수]

경제가 최악이면 그 나라 화폐가치는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코로나 봉쇄와 제재로 ‘고난의 행군’급 경제난을 겪은 북한에서 원화(북한 돈) 가치가 강세를 보이고 있어 의문이라고 블룸버그 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작년 10월 1달러당 8000원이던 북 환율이 지금은 5000원이라고 한다. 위안화도 1200원에서 700원이 됐다. 북한 민간이 보유한 달러와 위안화를 누가 흡수하고 있나.

/데일리NK
 
/데일리NK

북한 정권이 19년 만에 ‘돈표<사진>’를 발행했다고 북 전문 매체들이 보도했다. 평양 개선문 등이 그려진 실물도 공개했다. 외화를 장마당에서 바로 쓰지 말고 ‘돈표’로 바꿔 사용하라는 것이다. 작년 말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페이스북을 통해 평양 시내 상점들이 달러나 외화 선불카드 대신 북한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실상 달러, 위안화 사용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무역이 차단된 북 주민이 장마당에서 식량이나 생필품을 사려면 보유한 외화를 ‘돈표’와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울대 김병연 교수는 “1달러가 8000원에서 5000원이 되면 북 정권은 3000원을 앉아서 먹는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봉쇄가 장기화하면 북 정권의 외환 보유액도 바닥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예전처럼 주민이 가진 외화를 강제로 뺏을 수도 없다. 그러니 19년 전 ‘돈표’를 다시 꺼낸 것이다. 북한 돈이 달러로 대체되는 이른바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 심화할수록 김정은이 강조하는 자력갱생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북은 코로나를 계기로 주민들 달러를 긁어가면서 북한식 화폐 경제를 시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세계은행’도 잘 모르는 김정은 체제의 경제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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