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2차 전원회의 도중 오른손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특정 간부를 질책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정은은 김두일 노동당 경제부장을 발탁한 지 한달 만에 교체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2차 전원회의 도중 오른손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특정 간부를 질책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정은은 김두일 노동당 경제부장을 발탁한 지 한달 만에 교체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공개석상에서 농업부문의 허풍을 질책한 것은 북한 농업당국이 올해 식량생산 목표를 예년의 2배 수준으로 설정하는 등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웠기 때문으로 8일 알려졌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 매체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지난 4일 열린 제1차 시·군당 책임비서 강습회에서 “농업부문에 뿌리 깊이 배겨(베어)있는 허풍을 없애기 위한 투쟁을 강도 높이 벌려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북한에서 축산 공무원을 지낸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북한 농업성에서 올해 식량생산 목표를 800만t으로 세웠다. 이는 현재 북한 생산량인 400만t의 2배”라며 “코로나로 인한 국경봉쇄로 비료와 기름 등 영농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비현실적 계획을 보고해 허풍이란 질책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어 “8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이 경제실패의 원인을 ‘객관이 아니라 주관’에서 찾아야 한다며, 관료들의 패배주의, 보신주의를 질타한 후 농업성이 의욕적으로 식량 생산계목표를 높게 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최근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450만t 안팎이다. 2018년 455만t, 2019년 464만t이었고, 장마와 태풍 피해가 심했던 지난해엔 440만t으로 감소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4일 발표한 올해 1분기 ‘작황 전망과 식량 상황’ 보고서에서 작년 코로나19 사태와 태풍·홍수 등 자연재해가 겹쳐 북한의 식량 사정의 불안정성이 커졌다며 북한을 식량부족 국가로 재지정했다. 대북 소식통은 “올해도 북·중 국경이 봉쇄돼 비료와 농막 등 영농자재 수입이 안되고 있다”며 “기상 상황까지 안좋을 경우 올해 농사 작황도 개선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과거에도 북한 농업 부문의 ‘허풍’은 유명했다. 계획경제가 작동하던 김일성 시대 북한 당국은 1984년 1000만t의 알곡 생산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위급 탈북민 A씨는 “김일성 시대에는 수령에게 무조건 기쁨과 만족을 드려야 한다는 맹목적인 충성경쟁 때문에 식량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했다.

 

김정일 집권 시절엔 ‘선군시대 농촌'의 상징으로 불리는 양강도 대홍단군에서 책임비서 김성진이 감자 생산량을 3~4배 부풀려 보고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대홍단 왕감자'란 노래로 유명한 대홍단군은 1998년 김정일이 ‘감자 혁명’ 방침을 제시하고 대규모 감자 농업 단지를 조성한 특별지역이다. 김정일은 이듬해 제대군인 1000여명과 여성근로자 수십명을 대홍단에 배치하는 등 관심과 역량을 집중했다. 양강도 출신 탈북민 B씨는 “당시 김성진은 상습적으로 감자 생산 실적을 부풀려 보고했다가 ‘허풍쟁이’라는 의미로 ‘허성진’, ‘허풍이 너무 잦아 노망 났다’는 의미에서 ‘노성진’으로 불렸다”고 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로는 농업 생산물을 국가와 농민이 일정 비율로 나누도록 한 ‘분조제’가 도입되면서 식량 관련 통계 왜곡이 더욱 심각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들은 자기 몫의 식량을 더 챙기기 위해 생산량을 축소하고, 간부들은 상부에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하려 했기 때문이다.

탈북민 A씨는 “농민과 분조장, 작업반장 등 농장의 말단에선 식량 생산량을 최대한 축소해 자신들의 몫을 더 많이 챙기려 한다”며 “반면 시·군당 책임비서들은 국가식량계획을 달성 못하면 추궁을 받기 때문에 실적을 부풀려야 한다”고 했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왜곡된 식량 통계 때문에 군인·교사·공무원 등 식량공급 대상들에 제대로 배급을 줄 수 없다”며 “김정은이 말단 지도단위인 시·군당 책임비서들을 집결시킨 것도 ‘너희들이라도 제대로 된 보고를 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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