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미∙북 협상의 실무를 담당하며 평양까지 방문했던 랜들 슈라이버(Randall G. Schriver) 전 국방부 인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9일 본지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싱가포르 합의를 존중해 비핵화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싱가포르 합의 계승을 통한 미∙북 대화 조기 재개를 공언한 가운데, 북한과의 대화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던 트럼프 참모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랜들 슈라이버 전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담당 차관보
랜들 슈라이버 전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 담당 차관보

슈라이버 전 차관보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 합의 이전의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전략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미∙북 양자간의 합의를 이루기 위해 트럼프 정부가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북한이 최고의 외교적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정의용 신임 외교부 장관이 국회 청문회에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본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나는 김정은이 합의를 존중한다는 증거를 본적이 없다”고 했다.

슈라이버 전 차관보는 2018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미 국방부에서 한반도 정책을 총괄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인물로 알려져있다. 미 최고의 명문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스 칼리지를 졸업했다.

지난 2018년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왼쪽부터)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반도담당 보좌관, 랜들 슈라이버 국방부 차관보, 성 김 주 필리핀 미국대사가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과 만나기 위해 싱가포르 리츠칼튼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남강호 기자
지난 2018년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왼쪽부터)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한반도담당 보좌관, 랜들 슈라이버 국방부 차관보, 성 김 주 필리핀 미국대사가 북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과 만나기 위해 싱가포르 리츠칼튼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남강호 기자

슈라이버 전 차관보는 정부∙여당에서 축소 또는 연기론이 끊이지 않고 있는 한미연합훈련에 대해서는 “훈련 축소(scale-down)가 절대 북한이 선의의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지 못했다”며 “억지력과 준비 태세 강화를 위해 정상으로 돌아가야할 때”라고 했다. 대북정책 전면 검토에 들어간 바이든 정부를 향해서는 “북핵 위협에 맞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는 다 해봐야 한다”며 “대화를 재개하기 전에 북한이 과거의 약속들부터 지키도록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슈라이버 전 차관보는 격화하는 미∙중 갈등 속 한국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사람은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다(You are judged by the company you keep)’는 구절을 인용했다. “국경 지대에서 집단 학살(genocide)에 관여하고 있는 국가(중국)와 같은 편에 서는 것은 한국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입 여부를 놓고 국내에서 갑론을박이 한창인 중국견제용 다자안보협의체 쿼드(Quad)에 대해서는 “공유하고 있는 가치와 원칙들을 고려했을 때 모든 민주 국가들이 미국의 편에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한국의 가입에 우회적으로 찬성 입장을 내비쳤다.

총출동한 美안보라인 면담 -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마크 에스퍼(오른쪽에서 셋째) 미 국방장관 일행을 접견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문 대통령, 통역, 에스퍼 장관,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마크 밀리 합참의장,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 랜들 슈라이버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안보담당 차관보.
지난해 한국을 찾은 마크 에스퍼 당시 미 국방장관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했을 당시 배석한 슈라이버 전 차관보(사진 맨 왼쪽). /연합뉴스

한편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과거를 넘어 볼 수 있는 전략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한일이 안전과 안정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슈라이버 전 차관보는 2019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북한 등에 이익이 될 뿐’이라며 종료 결정 재고를 요청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국무부를 비롯한 미 조야(朝野)에서는 한일관계 개선과 함께 한·미·일 삼각 협력 복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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